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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2/07/09 14:05:01  김두호




곱사춤으로 한을 풀고 하늘로 간 공옥진 여사
고통스런 육신에서 피어났던 희열의 춤사위


 

희화된 서민사회의 한을 곱사춤으로 한마당 풀어내며 1980년대 전후 대학로의 스타로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공옥진 여사가 9일 새벽 81세로 한의 생애를 접었다. 교통사고 후유증과 뇌출혈 등으로 고향에서 10여년 투병생활을 하며 외롭게 만년을 보낸 공옥진 여사의 일생은 격랑의 시대를 몸 전체로 부대끼며 산 파란만장한 인생을 상징했고 우리 시대 전통 민속 예술인의 슬픈 자화상이었다.
판소리에 능하고 1인창무극의 전수자였지만 그를 보듬어 준 것은 결국 전남 무형문화재로 지정해준 고향밖에 없었다. 그의 타계를 계기로 인터뷰 365가 생전에 보도한 <그때 그 인터뷰> 기사를 다시 소개한다. 그 무렵도 공 여사는 기자들 찾아오는 것을 반기지 않았고  카메라를 거부할 정도로 세상 밖에서 조용히 은둔해 살았다.<편집자주>
 

【인터뷰365 김두호】‘곱사춤’의 전통무용가 공옥진 여사는 1970년대 말 공연무대의 특급 스타였다. 대학가 젊은이들은 축제판에 공 여사를 앞 다투어 초청했고, 1980년대로 넘어가도록 인기가 시들지 않았던 공 여사는 배창호 감독의 영화 <꼬방동네 사람들>을 통해 영화배우로 활동하는 사태까지 맞이했었다.

아, 그토록 신명나게 춤판을 벌이며 씩씩하게 살던 공옥진 여사도 이제 77살 추억 속의 할머니가 됐다. 최근에 전남 영광읍에 살고 있는 그녀를 찾아 간 어느 잡지사 기자가 당사자의 거부로 현재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지 못하고 기사만 올린 것을 읽은 일이 있다. 고향인 전남 영광군에서 설립한 영광예술연수원에서 혼자 살고 있고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건강도 여의치 않았던 것 같다.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귀향해 영광군 예술연구소 소장이라는 직함으로 조용한 노후를 맞이했던 공 여사는 호기 넘치는 시절의 모습을 세월에 묻어 버리고 이제 잊혀진 시간 속에서 그렇게 살고 있다.


곱사춤 외에도 문둥이춤, 장님춤 등 지체부자유자의 신체유형에 따른 갖가지 춤을 전통 예술로 살려낸 공옥진 여사는 그 분야에서 독보적인 명인이었다. 불행한 고통의 육신에서 헤어나는 희열의 춤을 보여주며 모두가 함께 어깨춤을 추도록 이끌던 공옥진 여사였지만  그 자신의 삶은  불행의 늪에서 한 평생을 살아 온 기구한 한의 세월이 있었다.


“육신이 온전치 못하다고 다 슬프게 사는 건 아니지요. 난 그 분들보다 더 기구한 팔자를 타고 났나봐요. 8살 때 어머니가 별세하시고 아버지마저 일본군 징병에 끌려가게 되어 졸지에 4남매가 고아가 됐어요.”


공옥진 여사의 ‘나의 인생 나의 예술’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30년 전인 1978년, 47세 공옥진 여사는 특유의 걸쭉한 목소리에 힘이 솟구쳤다. 고향은 영광군 영광읍 남철리. 창(唱)을 하는 공대일 씨의 4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5살에 아버지로부터 소리를 배웠고 한 번 본 춤은 잊어버리지 않고 재현하는 재주도 타고 났다.

힘들 때 만난 사람이 당대 최고의 무용가였던 최승희였다. 어린 재주꾼을 아끼는 어른들의 소개로 광주에 공연 온 최승희 씨의 양녀로 입적한 것은 행운이었지만 최 씨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면서 행운은 그녀를 비켜나갔다. 11살 되던 해 최 씨가 그녀 곁을 떠났고 일본에서 굶주림과 방황의 전쟁(2차 세계대전)미아로 헤매다가 13살 되던 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형편은 마찬가지였다. 걸식까지 하다가 간신히 아버지와 가족을 만나 다시 창을 배우는 기회가 찾아왔고 조선창극단에 입단해 무대에 오르는 기회도 찾아왔다. 그러나 그녀에게 불행의 바퀴는 제동장치가 없었다.


“17살에 정읍에서 결혼을 했지만 딸 하나 낳고 남편이 딴 여자와 살림을 차렸어요. 다른 남자를 만났지요. 그런데 그 남자에게는 부인이 있었지요. 10년을 살다가 헤어졌어요.”


국악무대의 주역이었던 임방울 씨를 만나 ‘협률사’, 김연주 씨의 ‘우리 국악단’, 김원술 씨의 ‘여성국극단’, 박녹주 씨의 ‘국극협회’를 옮겨가며 분주하게 활동하면서도 사는 것은 그녀를 지치고 슬프게 만들었다. 그래서 구례 화엄사에서 수계를 받고 스님이 됐다.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보다 불행한 사람이 많은데 나 혼자 도나 닦고 지내는 것이 편치 않더라구요. 뭔가 남에게 도움을 주고 살고 싶어 3년만에 산을 내려와 활동을 다시 시작했지요.”


국악활동을 시작하면서 번 돈으로 쌀독이 빈 집에는 쌀가마니도 사다주고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가난한 집에는 미역을 장만해주며 살다보니 유명해졌지만 돈을 모으지 못했다.


‘이빨 빠진 곱사춤’ ‘등 굽은 곱사춤’ ‘일본 곱사춤’ ‘중국 곱사춤’ 등 곱사춤만 36종류에 이른다는 공옥진 여사의 곱사춤은 이제 그녀와 함께 세월의 저편으로 떠나버렸다. 지치고 힘든 풍상의 생애를 보낸 공옥진 여사의 만년이 건강하고 평안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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