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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9/10/12 00:00:00  임정진




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22)
강우석 감독 이미연 주연의 80년대 히트작 / 임정진 작


 

이 영상소설은 1989년 개봉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소설화한 것이다.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입시 현실에 찌들어 꿈을 잃어가는 80년대 십대들의 모습을 ‘자살’이라는 무거운 모티브로 극화해 개봉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황기성사단 제작, 김성홍 각본, 강우석 감독의 이 영화는 배우 이미연  김보성의 데뷔작이며 이덕화 최수지 등이 공연했다. 영화의 흥행 성공에 이어 출판된 영상소설은 수십만 부가 팔려 역시 화제를 모았다.

본지에서는 80년대 대형 히트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를 영화 스틸과 함께 격일 연재한다.-편집자


출연

이미연-이은주, 김보성(당시 이름 허석)-김봉구, 최수훈-안천재, 이덕화-박길호, 최수지-강선생, 전운-교장, 최주봉-담임, 정혜선-은주어머니, 이해룡-은주아버지


수상

제26회 백상예술대상(1990) 남녀 신인연기상(김보성, 이미연), 시나리오상(김성홍)



22. 창수, 분노의 주먹 날리다



민호 아버지 황 선생은, 반 학생이 모두 참여하는 학급문집을 만들자는 반장의 얘기를 듣고 무척 기뻤다.

「나야, 너희들만 뜻이 맞으면 뭐든지 도와주지.」

「아이들한테도 의견을 물어 봤어요. 취업 나가는 건 대개 방학부터잖아요. 그러니까 방학 전에 원고는 모두 써내고 편집은 취업 안나가는 애들 중 몇 명이 하면 될 것 같아요.」

「그래, 좋지. 이제 졸업하면 뿔뿔이 흩어질 텐데 기념도 되고 좋지.」

「정미 아버지가 인쇄소 하신대요. 인쇄도 그냥 해주신다니 비용도 별로 들지 않을 거예요.」

「그래? 잘되었구나. 그래 난 뭘 도와주면 되지?」

「도와주시지 않으셔도 돼요. 저희 힘으로 해볼 거예요.」

「아구, 이거 굉장히 섭섭하네.」

황 선생은 아이들이 너무나 기특해 하루 종일 싱글벙글하고 다녔다. 송 선생이 그런 황 선생을 붙잡고 물었다.

「아니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같이 좀 즐겁게 삽시다.」

「우리 반 애들이 글쎄 졸업 기념으로 학급 문집을 만든대요. 얼마나 기특합니까? 자기들 힘으로 뭘 해보겠다고 단결해서... 그렇지 않아도 취업 나가네 어쩌네 하고 고3들은 싱숭생숭해서 서로 정도 없고 어영부영 1년 끌다 졸업해 버려 서운했었거든요. 얼마나 좋습니까?」

「학급 문집요?」

송 선생은 하나도 기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황 선생은 송 선생의 그런 태도가 이상하기만 했다. 송 선생은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툭 던지고 자기 자리로 가버렸다.

「말썽 안 생기게 감시 잘하세요.」

황 선생은 기가 막혔다. 학급 신문이나 학급 문집 때문에 교사가 징계를 받곤 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시작도 안 한 일을 가지고 말썽이니 감시니 하는 말은 하는 것이 우습기만 했다. 아이들이 자기의 생각을 글로 정리하고 함께 모여서 의논하고 책으로 묶어 두고두고 그것을 간직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인가. 3년 동안 상고에 다니면서 배운 지식보다도 더 귀한 체험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송 선생의 충고도 헛된 것은 아니었다.


봉구네 반은 수학 시간이 끝나고 청소를 하였다. 청소하다 혹 지갑이 나오지 않을까 하여 모두들 구석구석 들춰 보며 청소를 하였다. 다른 반 아이가 교실로 들어오더니 반장에게 다가갔다.

「니네 담임이 너더러 창수를 상담실로 보내래. 다른 애들은 눈치 안 채게.」

준식은 복도 유리창에 매달려 있는 창수를 불렀다,

「창수야, 나랑 대걸레 빨러 가자.」

창수는 반장과 함께 대걸레를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

「대걸레 이리 줘. 나 혼자 빨아 올게. 넌 지금 상담실로 가 봐.」

창수는 나쁜 예감이 들었지만 잠자코 상담실로 갔다. 상담실에는 상담 선생과 담임이 있었다. 창수가 들어서자 상담 선생은 나가버렸다. 아마 담임선생이 부탁한 모양이었다.

「앉아라.」

창수는 소파에 앉아 담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역시 예감대로였다.

「창수, 너 이번 일에 대해 뭐 아는 거 없니?」

담임은 애써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창수의 기분이 상하리라는 것은 각오하고 있었다. 창수는 단호히 대답했다.

「전 절대 훔치지 않았습니다.」

담임은 창수의 의외로 당돌한 태도를 보이자 놀랐다.

「훔쳤다고는 안했어. 나는 아무 증거도 없이 사람을 의심하지는 않아.」

「그럼 뭡니까? 분명히 그 시간에 교실에 남았던 주번은 놔두고 하필 저를 의심하는 이유가 뭐죠?」

「당연히 의심받을 위치에 있는 주번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그런데 전요?」

창수의 눈동자는 분노로 번뜩였다.

「어쨌든, 네가 그 시간에 교실 쪽으로 갔다는 건 확실한 거 아냐?」

「체육 시간에 빠져 나온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실에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교실로 들어간 것을 본 사람이 있습니까? 누굽니까? 가르쳐 주세요.」

「그건 안돼. 교실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됐어. 네 말이 진실이라면 그걸로 끝내.」

「그럴 순 없습니다.」

창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담임은 창수의 뜻밖의 반응에 놀랐다. 담임이 알고 있던 창수는 말이 없고 순종적인 학생이었으니까.

「뭐야?」

「억울해서 그럽니다. 선생님도 이미 저를 의심하고 있잖습니까?」

「그렇진 않아.」

담임은 잘라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창수의 말이 맞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분명히 그래요. 선생님은 제가 가난하기 때문에 돈이 탐나서, 그래서 돈을 훔쳤다고 확신하고 계신 겁니다.」

「이 자식이 근데?」

담임은 창수의 불손한 태도에 대한 화와 자신에 대한 미움이 한꺼번에 폭발해 창수의 뺨을 때리고 말았다.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창수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렸다. 상담실을 나선 창수는 더 이상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며 복도를 걸어갔다. 종섭이 창수에게로 다가왔다. 종섭은 반장이 창수에게 대걸레를 빨러 가자고 할 때 이런 사태가 벌어지리라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했었다.

「창수야, 너 담임 만났지? 그럴 줄 알았어. 아까 보니까 문도 그 새끼가 담임한테 뭔가 고자질하더라구.」

창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주먹이 부르르 떨려 왔다. 그리곤 교실을 향해 달렸다.


황 선생의 반에서는 매일 학급 회의가 열렸다. 그렇게 활발한 토의가 벌어지는 학급 회의를 황 선생은 본 적이 없었다. 어떤 내용으로 학급 문집을 꾸밀 것인가, 문집의 제목은 무엇으로 할 것인가, 외부인(다른 반 친구나 선생님들)의 원고는 얼마나 실을 것인가 등을 의논하느라 모두들 진지했다. 황 선생은 교실 뒤에 앉아 아이들이 의견을 내고 수정하고 결정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참견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느라 애썼다. 반장이 절대로 선생님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에 황 선생은 회의에 끼어들 자격이 없었다.

사흘간의 의논 끝에 문집의 윤곽이 대충 잡혔다. 황 선생에게게는 <실업인에게 주는 글>이란 제목의 글을 써달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황 선생은 원고지 30장 분량의 일거리 외에는 아무것도 간섭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학생들의 의젓한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

기획 특집으로는 <실업인, 어디로 가는가>라는 테마가 잡혔고, 공동 창작시 다섯 편을 분단별로 짓기로 했다. 그 외는 앙케이트와 시, 수필, 일기, 편지 등 다양한 형태의 글을 반 전체가 한 편씩 써내기로 했다.

공동 창작시를 짓느라 분단별로 저녁마다 모여서 의논을 하는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종섭에게서 문도 이야기를 들은 창수는 온몸이 분노로 터질 것만 같았다. 교실 문을 여니 청소가 끝나고 다들 자리에 앉아 담임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문도는 창수가 자기를 노려보는 줄도 모르고 촉새와 잡담을 하고 있었다. 독기 품은 독사처럼 창수가 문도를 쳐다보고 있음을 촉새가 먼저 알아차렸다.

「문도야, 저기 창수가...」

문도가 얼른 뒤돌아보자 거기엔 살기가 느껴지는 눈매의 창수가 서 있었다. 창수가 주먹을 꽉 쥐고 문도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문도는 겁에 질려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창수가 그렇게 무섭게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다른 아이들도 무서워 문도와 창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갑자기 문도가 몸을 돌려 교실 앞쪽을 향해 달아나려 했다. 창수는 펄쩍 뛰어 문도를 잡으려 했다. 문도는 책상 위로 올라 책상을 밟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창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무엇이나 던지며 쫒아갔다. 여학생들은 비명을 질러 대 순식간에 교실은 난장판이 되었다. 교실 밖으로 나가려던 문도는 그만 책상에 걸려 넘어지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창수가 달려왔다.

「이 새끼, 너 증거도 없이 날... 비겁한 새끼...」

창수는 주먹과 발길이 닥치는 대로 휘두르며 문도를 때렸다. 문도는 제대로 막아 보지도 못하고 정신없이 맞으며 비명을 질렀다. 코피가 터지고 입 안에서도 찝질한 맛이 났다. 남자 아이들 몇이 달려들어 창수를 말리려 했지만 미친듯이 날뛰는 창수에게 얻어맞기만 했다. 그 틈에 문도는 엉금엉금 기어서 교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아이들을 밀치고 창수가 잽싸게

달려오더니 문도의 얼굴을 발길로 걷어차 버렸다. 문도는 입에서 피를 뱉으며 나동그라졌다. 여럿이 한꺼번에 창수에게 달려들어 손과 발을 잡았다.

「창수야, 너 왜 이래. 이러다 문도 죽이겠어.」

누군가 창수에게 소리쳤다. 창수는 몸부림을 치면서 울부짖었다.

「놔, 놔, 놓으란 말이야. 죽여 버릴 거야. 놔.」

봉구와 천재는 창수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흘렸다,

「됐어, 창수야. 문도는 이제 정신이 들었을 거야. 그만해, 됐어.」

준식이 다른 아이 한 명과 함께 문도를 부축해 나가 버렸다. 문도가 보이지 않자 창수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것 같았다.

「 이거 놔.」

창수는 아이들을 뿌리쳤다. 문 쪽으로 나가는 듯하다가 벽에 걸린 거울을 주먹으로 쳤다. 거울은 부서져 떨어지고 창수는 바닥에 피를 뚝뚝 흘리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창수야, 어디 가?」

봉구와 천재가 창수 뒤를 쫒아갔다. 그러나 창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재빠르게 뛰어갔다. 둘은 창수를 잡지 못하고 말았다. 창수는 울면서 교문을 뛰쳐나갔다.

양호 선생은 느닷없이 아이들이 문도를 둘러메다시피 부축하고 들어오자 얼른 침대 시트를 펴고 문도를 눕히도록 했다.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라 어디를 다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선 알콜 솜으로 얼굴의 피를 닦아 냈다.

「아니 어떻게 된 거니?」

아이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싸웠어요.」

「싸우긴 야, 문도가 일방적으로 당했지.」

「얻어맞아 다친 거예요. 턱 안 부서졌나 잘 봐주세요. 때린 애가 권투 선수거든요.」

대충 피를 닦고 난 강 선생은 문도의 이가 하나 부러진 것을 발견했다. 코피가 계속 나서 코에는 얼음찜질을 해주고 다른 곳이 괜찮은지 물었다.

「모르겠어요. 하도 정신없이 맞아서」

문도는 힘없이 대답하며 바지를 걷어 올렸다. 왼쪽 무릎아래가 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강 선생은 해줄 수 있는 치료를 해준 뒤 아이들에게 문도를 데리고 치과로 가라고 일렀다.


그런 사건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담임선생은 상담실 최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 걔가 뭐라고 합니까?」

「교실엔 안 들어갔다는군요. 거짓말 같지는 않았어요.」

「그 아이에게 몹쓸 짓만 한 셈이군요.」

최 선생은 담임에게 담배를 한 대 권했다. 담임은 지친 모습이었다.

「이런 일 생길 때마다 한 2년씩 지레 늙는 것 같습니다. 돈 잃어버린 아이에게 화가 납니다. 돈을 찾아도 못 찾아도 속상한 거 아닙니까? 나는 아이들을 의심하고 아이들은 친구를 의심하고, 이게 무슨 꼴입니까?」

「도난 사건은 한 반에서 일 년에 한두 번 꼭 있어요. 사람 사는 데는 꼭 도난사건이 끼어들거든요. 요즘은 오락실 때문에 남의 돈에 손대는 아이가 많아요. 그게 아주 돈 잡아먹는데 선수예요. 순식간에 한 달 용돈 다 날리고 또 하고 싶으니까 친구 돈에 눈독을 들이지요. 노름꾼이 노름에 정신 팔리면 자기 마누라도 판돈으로 걸잖아요.」

「게다가 요즘 애들은 어떻게 죄책감이 없어요. 작년에 우리 반에선 워크맨이 없어졌어요. 간신히 잡았는데 그 녀석이 뭐라는 줄 아세요? <우리 엄마가 물어줄 거예요> 어후, 속 터져.」

「그만 교실에 가보세요. 아이들이 다 기다릴텐데.」

담임은 할 수 없이 일어나 교실로 왔다. 창수를 어떻게 보나 걱정하며 교실로 들어셨다. 교실은 믿을 수 없게 조용했다. 빈자리가 셋 있었다.

「반장, 저 빈자리 어떻게 된 거야?」

준식이가 일어섰다. 이런 즐겁지 않은 일에 늘 나서야 하는 것이 반장의 책임이었다.

「문도가 병원에 갔습니다. 촉새는 문도 부축하느라...」

「자리가 셋이잖아.」

「창수는...」

「뭐야. 똑바로 말해봐.」

「창수와 문도가 싸웠습니다. 문도는 다쳐서 병원에 간 거고 창수는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잘들 한다. 돈 없어지고 싸움질해서 다치고.」

담임은 속이 상해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화단의 철쭉이 활짝 피어 있었다.

(창수야, 잠깐이나마 널 의심한 날 용서해라. 미안하다. 그렇다고 문도에게 그런 식으로 복수하는 건 옳지 않다. 세상일은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란다.)

담임은 창 밖에 지나다니는 아이 중에 혹 창수가 없나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창수의 얼굴은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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