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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9/11/01 00:00:00  임정진




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28)
강우석 감독 이미연 주연의 80년대 히트작 / 임정진 작


 

이 영상소설은 1989년 개봉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소설화한 것이다.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입시 현실에 찌들어 꿈을 잃어가는 80년대 십대들의 모습을 ‘자살’이라는 무거운 모티브로 극화해 개봉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황기성사단 제작, 김성홍 각본, 강우석 감독의 이 영화는 배우 이미연  김보성의 데뷔작이며 이덕화 최수지 등이 공연했다. 영화의 흥행 성공에 이어 출판된 영상소설은 수십만 부가 팔려 역시 화제를 모았다.

본지에서는 80년대 대형 히트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를 영화 스틸과 함께 격일 연재한다.-편집자


출연

이미연-이은주, 김보성(당시 이름 허석)-김봉구, 최수훈-안천재, 이덕화-박길호, 최수지-강선생, 전운-교장, 최주봉-담임, 정혜선-은주어머니, 이해룡-은주아버지


수상

제26회 백상예술대상(1990) 남녀 신인연기상(김보성, 이미연), 시나리오상(김성홍)



28. 오페라와 햄버거



민호는 오래간만에 집에 일찍 들어갔다. 학기말 고사를 보고 나니 기운이 쭉 빠져 독서실에서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일찍이라지만 밤 9시가 다 되어 귀가한 것이었다. 집에 오니 고모가 와 있었다.

「고모, 안녕하세요? 웬일로 여기까지 왔어요? 나 보고 싶어서?」

「그래, 공부는 잘되니?」

「그런 거 말고 딴 거 좀 물어 봐 주면 안 되우? 고모까지 이러면 젊은 조카 섭섭하지?」

「이놈아, 공부 말고 다른 거 하는 게 있어야 물어보지?」

고모는 민호의 코를 가볍게 쥐었다 놓았다.

「왜 없어요? 요새 밥은 잘 먹냐, 똥은 잘 싸냐, 잡은 잘 오냐, 여드름은 어떠냐, 용돈은 모자라지 않냐, 여자 친구는 잘 있나 등등.」

고모는 가만히 웃기만 했다. 대학 졸업 후 고모는 말수가 적어지고 기운도 없어 보였다. 민호는 그런 고모가 불쌍했다. 사범대를 나오면 자연히 교사가 되는 줄 알고 계신 시골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실망시켜 드리는 것도 못 할 짓이고 고모 자신도 자기 자신에게 꽤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민호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누워 음악을 들었다.

(대학만 가면 다 해결될 줄 알았더니 고모 보니까 그것도 아니군. 대학 나오면 또 취직 관문에서 입시생이 되어야 하구. 취직을 해도 또 다른 시험이 날 기다리고 있겠지. 젠장 언제나 시험에서 벗어나서 좀 자유롭게 살아 보는 거야?)


민호 아버지는 10시가 다 되어서 술 냄새를 풍기며 돌아왔다.

「오빠, 저 왔어요.」

「그래. 저녁 먹었니?」

민호 어머니가 옷을 받아 들며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요샌 매일 술을 잡수시고 늦게 오신다우. 아가씨가 좀 그러지 말라구 얘기해 줘요. 안 그러시더니...」

민호 아버지와 고모는 안방에 마주앉았다. 고모가 머뭇머뭇 입을 떼었다.

「오빠, 부탁이 있어서 왔어요. 오빠 신세 안 지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작년에 고추 때문에 손해를 많이 보셔서 가지신 돈이 얼마 없대요. 그렇다고 농사짓는 땅을 파시게 할 수도 없고. 좋은 자리가 났어요. 친구 삼촌이 그 학교 이사장하고 의형제 맺은 사이래요. 그래서 면접 보는데...」

「그래, 얼마래?」

민호 아버지는 화를 누르며 물었다. 고모는 조심조심 오빠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아버지가 5백은 해주신댔으니까 오빠가 5백만 꿔주시면 일 년 후에 갚겠어요.」

「뭐야?」

민호 아버지는 허탈한 표정이 되었다.

「전엔 3백이면 된다고 했잖아.」

「그건 서울도 아니고 3년 계약 자리였지만 이번에 8학군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천만 원이라니 말이 되니?」

「오빠.」

고모는 다급해져서 앞으로 조금 당겨 앉았다.

「오빠, 언제까지 이렇게 빈둥대며 놀 순 없잖아요. 빽없고 줄없는 나한테 그만한 자리에 추천이 들어온 것만 해도 행운이에요. 친구가 그러는데 그 학교 수준이면 천만 원은 일 년이면 뽑는대요.」

민호 아버지는 허허 웃었다.

「일 년이면 뽑아? 이건 교사가 되러 가는 게 아니고 무슨 증권 투자라도 하러 가는 것 같구나. 네가 바라던 교사가 그런 교사니?」

「오빠, 오빤 지금 내 입장이라면 그렇게 고고한 척하실 수 있을것 같아요? 지금 교사의 위신, 양심 그런 건 나한테 수치예요. 교단에 서지 못하면 전 뭘 할까요? 4년간 전 교사가 될 준비만 해왔어요. 그런데 이제 고향에 가서 농사를 거들까요? 부모님이 좋아하실까요? 고향 사람들이 절 기특하다고 할까요? 오빠라면 어떡하시겠어요?」

고모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민호 아버지는 누이동생을 붙잡고 함께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동안 저축했던 돈, 전세금 4백 올려 주고 나니까 민호 대학 입학금 하기도 버거운 지경이다. 미안하다. 오빠가 가난해서. 우리 학교는 그 흔한 촌지는커녕 이사장, 교장 생일이면 월급에서 얼마씩 떼어 가는 학교야. 일 년에 천만 원씩 뽑아내는 화수분 같은 학교가 아니거든. 으이-」

황 선생은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세면기에 물을 틀고 자꾸만 자꾸만 세수를 했다. 고모는 울면서 가버렸다. 민호 어머니는 오누이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가슴이 저려 민호 고모가 가는 것을 보고도 잘 가라는 인사도 하지 못했다. 민호 어머니는 민호 방으로 들어갔다. 민호는 고모가 울며 간 것도 모른 채 음악을 듣다 잠이 들었다. 민호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민호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는 물끄러미 민호를 쳐다보았다. 민호가 대학을 졸업할 때쯤에는 이런 일들이 없기만을 바라며 민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봉구네 반은 시험이 끝나자 온통 답을 맞춰 보는 소리로 소란해졌다.

「2번이야? 아구 죽갔네, 2번 했다가 아무래도 아리까리해서 3번으로 고쳤는데. 원통하다. 원통해.」

「야, 그거 1번 아니야. 여기 봐. <명사적 용법이 아닌 것은>이잖아. 너 명사적 용법인 것인 줄 알았구나.」

「이거 답 두 개 같지 않니? 1번으로 해석 할 수도 있고 4번도 되잖아. 아니라구? 못 살어, 내가 못 살어.」

책상을 치며 원통해 하는 아이도 있고 펄쩍펄쩍 뛰며 환호성을 울리는 아이들도 있엇다. 봉구는 시험지를 들고 얼굴을 찡그렸다. O표보다 X표가 더 많았다. 그러다가 은주를 쳐다보니 은주는 차분히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어후, 쟨 너무 무서운 애야. 시험 끝나자마자 또 책 볼 기분이 들까?)

봉구가 쳐다보는 줄도 모르는 은주는 잠시 책을 보가 고개를 들고 위를 쳐다보았다. 어젯밤 4시간밖에 자지 못해 몹시 피로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보아도 머리가 아팠다. 은주는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은주는 세면대에 물을 채우고는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쳐다보았다. 열일곱 살이라고 봐주기엔 너무나 생기가 없었다. 찬물로 세수를 했다.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아 고개를 드는데 그만 코피가 나기 시작했다. 세면대에 있는 물 위로 후두둑 핏방울이 떨어져 퍼졌다. 은주를 고개를 들지도 않고 물속에 피가 퍼져 나가 점점 붉게 되는 것을 바라보았다.



보충수업도 자율학습도 없던 즐거운 날이 끝났다. 시험이 끝났으므로 월요일부터는 다시 보충과 자율이란 괴물에게 기력을 빼앗기고 타율적으로 살게 되는 나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은주는 시험이 끝난 것이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 들어서면 온통 간판으로 뒤덮인 상가가 있었다. 그 상가 뒤로 놀이터가 있고 놀이터를 지나면 은주가 타야 할 엘리베이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시험이 끝난 날, 기운없이 집으로 돌아가던 은주는 놀이터와 엘리베이터 사이에 봉구가 끼어 있음을 발견했다. 그러나 봉구를 아는 체 하고 싶지는 않았다. 봉구가 공부는 못해도 의리가 있고 성격도 밝은 좋은 아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미 귀찮게 하지 말라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창수 사건 이후로 아이들과 좀더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부쩍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갑자기 스스럼없이 대하긴 어려웠다. 봉구는 은주가 자기를 발견하자 오히려 고개를 딴 쪽으로 돌리며 못 본 체했다. 봉구는 은주가 지나쳐야 할 길목을 지키고 있었지만 은주는 봉구 곁을 무심하게 지나쳐 갔다.

봉구는 그제서야 당황하여 급히 은주를 따라가 은주 앞을 가로막아 섰다.

은주는 봉구를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봉구는 은주의 표정이 <할말 있으면 해봐>라고 말하는 것 같아 우물쭈물하다가 간신히 한 마디 했다.

「시... 시험 잘 봤니?」

은주는 봉구의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자 냉정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응, 그럭저럭. 근데 웬일로 여기까지 왔니?」

「아, 아니 그냥 지나가던 길에... 시험 잘 봤나 궁금해서...」

은주는 봉구의 순박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가만히 봉구를 쳐다보았다.

「잘 봤다니 다행이야.」

은주는 순간적으로 <혹 위에서 엄마가 내려다 보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봉구와 헤어져야만 했다.

「나 그만 들어가 봐야 해, 엄마가 기다리고 계셔.」

「그, 그래. 그만 갈께. 아... 안녕.」

봉구는 은주 입에서 엄마 얘기가 나오자 여기서 얘기하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봉구는 얼른 돌아서서 도망치듯 사라졌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은주는 혼자 배시시 웃었다.

일요일 새벽에 봉구는 또 교회에 갔다. 이제는 더 이상 망설일 것 없이 용감히 대쉬하기로 결심했다. 그렇다고 무슨 짓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은주 어머니가 눈을 감고 기도하는 틈을 타 은주에게 살짝 쪽지를 주고 교회에서 나와 버렸다.

은주가 어머니 몰래 살짝 펴 본 쪽지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난 너 때문에 아침도 안 먹었다. 너희 집 근처에 맥도날드 햄버거집 있지? 거기서 아침 안 먹고 기다릴 거다. 네가 안 오면 나는 거기서 굶고 기다릴 거다. 알았지?

배고프고 졸린 불쌍한 봉구가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고 집에 와서 아침을 먹은 은주는 봉구가 얼마나 배가 고플까 생각하니 자꾸 웃음이 나왔다. 은주 어머니는 약속대로 음악회 티켓을 준비해 두었다.

「자, 오페라 공연 티켓이다.」

은주는 덤덤한 표정으로 티켓 두 장을 받아 들었다. 왜 어머니는 무슨 음악회에 가고 싶은지 내게 물어 보지도 않는 걸까.

「시험도 끝나고 마침 일요일이니까 긴장도 풀 겸 소양도 쌓을 겸 음악회 가는 것이 좋겠지? 엄마가 같이 가려고 했는데 마침 대학 동창 모임이 있어서 말이야...」

「소연이와 같이 가겠어요.」

「그래? 소연이라면 괜찮지. 공부는 별로던데 집안이 아주 좋더구나. 저번에 학부모회의 때 소연이 엄마와 인사했다.」

「착한 아이예요.」

「음악회가 9시에 끝나는데 차 보내 줄까? 엄마가 데리러 가진 못할 것 같으니까 아빠 차 보내 줄까?」

「아녜요. 좌석버스 타고 오겠어요.」

「그래. 늦지 않도록 해라.」

「네.」

점심때가 되어 은주는 어머니가 외출하자 급히 옷을 갈아입고 맥도날드로 뛰었다. 봉구가 가버리지 않았을까. 여태 굶고 있으니 배가 고파 쓰러지지나 않았을까 걱정이 되어 마음이 급했다. 1층에는 봉구가 없었다. 2층으로 올라갔다. 봉구는 세 겹짜리 대형 햄버거를 물고 있다가 은주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은주는 <킥킥> 웃으며 봉구 자리로 가 마주앉았다.

「아침 안 먹고 기다린다며?」

「헤헤. 나 아침 안 먹었어. 이거 점심이야. 점심.」

봉구는 은주가 나타나 준 것이 너무나 기뻐 입이 다물어 지지 않았다.

「어서 먹어. 배고팠겠다.」

「너 저 창가에 가서 밖에 내다보고 있을래?」

「왜?」

봉구는 바보같이 벌쭉벌쭉 웃으며 은주에게 창밖을 내다보라고 독촉했다.

할 수 없이 은주가 창가에 앉자 그제서야 봉구는 한 입 베어 물은 햄버거를 다 먹어 치웠다. 잠시 후 은주가 자리로 돌아오자 봉구는 콜라를 권했다.

「너 무슨 배짱으로 계속 기다린다고 했니? 내가 안 오면 어쩌려구?」

「히히, 안 오면 할 수 없지 뭐. 근데 너 어떻게 빠져 나왔니?」

「빠져 나오긴? 당당히 허락받고 나왔다.」

「나 만난다구 허락받았어?」

「꿈도 크다. 그건 아냐. 근데 왜 아까 나한테 창가에 가 있으라고 했어?」

「으응... 우선 나가자, 나가. 여기서 난 벌써 몇 시간째인지 몰라. 지겨워 죽겠다. 그리고 잘생긴 놈이 너무 많이 와서 아주 불쾌해.」

봉구는 은주가 자길 만나 주러 나왔고 게다가 새침 떨지 앉고 말도 잘해서 무슨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으아-악. 10억짜리 복권이 맞아도 이렇게 째지지는 않을걸? 하필 그 큰 햄버거를 먹을 때 은주가 나타날 게 뭐람. 하마처럼 입을 벌리고 진공청소기처럼 햄버거를 쓸어 넣는 걸 봤어 봐, 당장 집으로 갔을 거야. 은주같이 고상한 애랑 사귀려면 조심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은주는 봉구에게 음악회 티켓을 보여 주었다. 음악회 시간까지는 아직도 몇 시간이나 남아 있어 봉구는 또 입이 헤 벌어졌다. 둘은 우선 동숭동에 가서 돌아다니며 구경하기로 하고 지하철을 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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