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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9/11/03 00:00:00  임정진




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29)
강우석 감독 이미연 주연의 80년대 히트작 / 임정진 작


 

이 영상소설은 1989년 개봉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소설화한 것이다.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입시 현실에 찌들어 꿈을 잃어가는 80년대 십대들의 모습을 ‘자살’이라는 무거운 모티브로 극화해 개봉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황기성사단 제작, 김성홍 각본, 강우석 감독의 이 영화는 배우 이미연  김보성의 데뷔작이며 이덕화 최수지 등이 공연했다. 영화의 흥행 성공에 이어 출판된 영상소설은 수십만 부가 팔려 역시 화제를 모았다.

본지에서는 80년대 대형 히트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를 영화 스틸과 함께 격일 연재한다.-편집자


출연

이미연-이은주, 김보성(당시 이름 허석)-김봉구, 최수훈-안천재, 이덕화-박길호, 최수지-강선생, 전운-교장, 최주봉-담임, 정혜선-은주어머니, 이해룡-은주아버지


수상

제26회 백상예술대상(1990) 남녀 신인연기상(김보성, 이미연), 시나리오상(김성홍)



29. 봉구와 천재, 사랑에 미치다



천재는 양호 선생님에게 좀더 접근하기로 마음먹고 아버지가 사우나 간 새 아버지 양복 중 제일 비싼 것을 꺼내왔다. 그리곤 어머니가 목욕탕에 들어가 빨래하는 새 살쩍 집을 빠져 나와 강 선생이 사는 아파트로 찾아갔다.

천재는 아파트에 들어서기 전에 우선 꽃 가게에 들렀다. 거금을 털어 빨간 장미 스무 송이 포장을 부탁했다. 아버지 양복은 품이 약간 컸지만 그럭저럭 맞았고 장미도 잘 포장되었으므로 천재는 기분이 좋았다. 아파트 현관 쪽으로 가는데 낯익은 두 얼굴이 현관에서 나오고 있었다.

「윽, 저건...」

학생 주임 박 선생과 강 선생이었다. 천재는 얼른 다른 현관에 몸을 숨기고 내다보았다. 두 사람은 팔짱까지 끼고 천재의 반대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천재는 눈가의 근육이 저절로 씰룩이는 걸 느꼈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화가 치밀어 숨이 헉헉거릴 지경이었다. 천재는 애써 포장까지 해온 장미를 바닥에 있는 힘껏 내팽개쳤다. 그리고는 허둥지둥 두 사람 뒤를 쫓아갔다. 이번에 놓치면 영영 강 선생을 보지 못할 것만 같았다.


은주와 봉구는 동숭동을 샅샅이 구경하고 팝콘도 사먹고 비둘기에게 과자도 준 후 음악회에 갔다. 청바지를 입고 있는 사람은 봉구 하나뿐이었다. 모두들 깨끗하고 화려한 옷들을 입고 자기 좌석을 찾아 앉았다. 봉구는 괜스레 주눅이 들어 은주 뒤만 졸졸 따라가 조용히 앉자 고개를 숙이고 팜플렛만 읽었다.

오페라가 시작되었다. 봉구는 오페라라는 게 팝송처럼 영어로 하는 것인 줄 몰랐다.

「야, 은주야, 우리나라 가수인데도 영어로 한다?」

「저건 영어가 아냐, 이태리어야.」

옆사람이 듣지 않게 속삭였지만 봉구의 얼굴은 벌개졌다.

(요놈의 주둥아리. 그냥 있으면 어디가 덧나? 그런데, 아니, 이태리어를 누가 알아듣는다고 이태리말로 노래를 하냐? 웃긴다.)

봉구는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이태리말을 이해하는지 즐거운 표정으로 무대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별수없이 봉구도 부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10분쯤 지나자 저절로 하품이 나왔다.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하다 <아차> 싶어 얼른 입을 꽉 다물었다. 은주가 쳐다보고 있었다. 봉구는 점잖은 표정으로 아리아를 감상했다.

(어휴, 이걸 돈 내고 보러 오냐, 집에서 주부 가요 열창 보는 게 더 재밌겠다. 저렇게 뚱뚱한 여자가 오페라 가수야? 와우, 주인공 맡을 가수는 좀 최수지같이 생겨야지.)

봉구는 노래는 듣지 않고 딴 생각만 했다. 은주 역시 따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래간만에 누리는 자유 시간을 이렇게 따분한 곳에서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은주는 봉구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봉구는 은주의 손가락이 느껴지자 온몸이 찌르르했다. 얼른 은주를 쳐다보자 은주가 눈짓과 손짓으로 나가자는 시늉을 하며 일어서는 중이었다. 봉구는 무릎에 놓았던 팜플렛을 떨어뜨리고 은주를 따라 일어서 나왔다.

밖으로 나온 둘은 서로 마주보며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는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 나오다 게시판에 붙은 포스터를 보았다.

「저거다, 저거야.」

봉구가 포스터를 가리키자 은주도 신이 난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그래, 가자. 지금 가면 30분쯤 못 보겠다. 빨리 가자.」

봉구와 은주는 이문세 콘서트가 열리는 체육관으로 갔다. 입구에서부터 콘서트장의 열기가 느껴졌다.

「와우, 사람 되게 많다.」

봉구는 조금이라도 편한 자리를 은주에게 확보해 주려고 좌충우돌 몸싸움을 벌였다. 무대와 멀어서 얼굴은 자세히 안 보였지만 관객들의 열기와 멋진 노래를 감상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자리도 없어 둘은 다른 아이들 틈에 끼어서 통로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나 얼마 안 가 통로고 좌석이고 구분없이 다들 일어서서 같이 노래 부르고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르게 되고 말았다. 봉구는 은주가 곁에 잇는 것도 잊고, 은주 역시 봉구의 존재를 잊은 채 공연에만 몰두하였다.

공연이 끝나 갈 무렵 발라드가 몇 곡 계속되자 그제야 객석은 진정되어 조용해졌다.

「마지막 곡입니다. 오늘 와주신 여러분들 정말 고맙습니다... <그대와 영원히> 들려드리며 이번 공연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관객들은 너도나도 어깨동무를 하였다. 그리고는 허밍으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은주와 봉구도 어깨동무를 하였다. 은주는 오길 잘했다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공연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갑자기 시장기가 밀려 왔다. 콘서트 보느라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비한 탓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녁 먹을 시간도 지나 있었다. 봉구는 배가 고파 쓰러질 지경이라고 엄살을 떨며 은주에게 무엇이 먹고 싶냐고 물었다.

「나, 김밥하고 떡볶이.」

「애걔, 겨우? 그런 건 맨날 먹는 거니까 오늘은 근사한 거 먹자. 나 돈 있어. 누구처럼 뷔페는 못 데리고 가지만...」

「아냐. 정말 그게 먹고 싶어. 난 평소에 그런 거 사먹을 기회가 없었어.」

「정말?」

봉구는 몇 번이나 확인을 하고 은주와 함께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여기, 김밥 2인분, 떡볶이 2인분, 우동 2인분 주세요.」

봉구가 줄줄이 주문을 하자 은주가 쿡쿡 웃었다.

「봉구야, 도합 6인분이야. 우린 둘뿐이잖아.」

「걱정 마. 나 돈 있어.」

「후후, 6인분을 누가 다 먹어?」

「누구? 나랑 너.」

그러나 막상 음식이 나오자 놀란 것은 봉구 쪽이었다. 은주가 너무나 맛있게 쉬지도 않고 먹어대는 것이었다. 봉구는 신기해서 은주가 먹는 것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놀랍게도 은주는 우동을 후루룩후루룩거리며 먹기도 했다. 봉구로서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우와, 은주가 저렇게 먹다니... 새침떼기인 줄만 알았더니... 이래서 사람은 같이 밥을 먹어 봐야 한다는 거구나. 4인분 더 시켜야겠네.)

혼자 열심히 먹던 은주는 봉구가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왜 안 먹니?」

「응, 먹을 거야.」

봉구는 씨익 웃으며 은주를 쳐다본 채 손만 김밥으로 가져갔다. 김밥을 집는다는 게 그만 그 옆의 떡볶이를 집었는데도 봉구는 그냥 고추장 양념을 뚝뚝 흘리며 입에 넣었다. 은주와 이렇게 마주앉아 있다는 게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아서 얼마 전의 배고픔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옷에도 고추장 물이 묻고 입가에도 묻었지만 봉구는 아랑곳하지 않고 은주를 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은주도 그런 봉구의 모습을 보니 더 이상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 푸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히히.」

봉구는 손에 묻은 고추장 국물을 쪽쪽 빨았다.



영화를 보고 나온 박 선생과 강 선생이 <독일 호프>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천재는 이를 꼭 물고 따라 들어갔다. 그리 넓지는 않은 레스토랑이었는데 몇 자리 떨어져 앉은 천재를 두 사람은 알아보지 못했다. 둘의 얘기에 열중하느라 다른 것은 쳐다볼 겨를도 없는데다가 천재가 양복을 입고 있어 학생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니 무리는 아니었다. 천재는 자꾸만 맥주를 시켰다. 맥주 여섯 병을 다 마시도록 박 선생과 강 선생은 즐거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강 선생이 웃을 때마다 천재는 자기를 비웃는 것만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호호, 그 돼지 같은 애 있죠? 천재라고 하던가? 글쎄 나한테 와서 뭐랬는줄 아세요? 절 사랑한대요. 호호호, 우습죠? 건방지게 제까짓 게 날 사랑한다니... 성적은 반에서 꼴찌래요. 지가 무슨 스필버그를 능가하는 영화감독이 된다나? 영화감독은 아무나 해요? 엑스트라라도 되면 행운이지. 안 그래요? 호호호.)

꼭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천재는 벌떡 일어섰다. 생각처럼 똑바로 서지지가 않았다. 천재는 비틀비틀대는 자기 몸을 탁자에 기대며 간신히 강 선생 앞으로 갔다.

박 선생과 강 선생은 누군가 옆에 와서 서는 걸 느끼고 쳐다보았다.

「어머.」

「아니, 넌.」
두 사람이 놀라는 것을 보고 천재는 웃어 주려고 했다. 그러나 천재는 <쿵> 소리를 내며 탁자에 머리를 부딪치고는 쓰러졌다.


봉구와 은주는 6인분의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일어섰다.

은주네 아파트에 도착하니 봉구는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가로등 불빛을 따라 놀이터까지 걸어온 둘은 미끄럼틀 옆에 나란히 섰다.

「이제 그만 가봐. 여기서부턴 나 혼자 가야 돼.」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싶은데...」

봉구는 투정하는 어린아이라도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순 없었다.

「그럼 안 된다는 걸 잘 알잖아. 지금쯤 어머니가 날 기다리시느라 베란다에 나와 계실지도 모르니까.」

봉구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으나 아쉬운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이 이렇게 섭섭한 것인지 몰랐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결혼을 하는구나. 왜 귀찮게 결혼들을 하나 했더니만...)

봉구는 결혼의 필요성을 깨닫는 자신이 대견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덕분에 정말 즐거웠어. 오늘처럼 즐거워 보긴 난생 처음이야. 정말이야.」

「그건... 나두 그래.」

봉구는 정말 그동안 너무 불행했던 것처럼 느껴졌다.

오늘부터 행복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나 갈게.」

은주가 손을 내밀었다. 봉구는 숨을 죽이고 손을 내밀어 은주와 맞잡았다. 손에 쥐가 날 것만 같고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정말 고마웠어. 넌 참 좋은 아이야.」

은주는 봉구가 가만히 있자 봉구의 마음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마냥 서 있을 수 없었다.

「잘 가, 봉구야,」

은주는 손을 놓고 돌아서려 했다.

「은- 은주야.」

봉구는 다급해져서 은주를 불렀다.

「나, 나 말이야.」

봉구는 머리를 긁적긁적 긁었다.

「나 시간 많어.」

은주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집을 향해 갔다. 봉구는 은주가 현관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도 계속 서 있었다. 한참을 서 있다가 놀이터에 있는 철봉에 매달려 거꾸로 세상을 쳐다보았다. 세상은 더 이상 예전의 세상이 아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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