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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9/11/07 00:00:00  임정진




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30)
강우석 감독 이미연 주연의 80년대 히트작 / 임정진 작


 

이 영상소설은 1989년 개봉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소설화한 것이다.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입시 현실에 찌들어 꿈을 잃어가는 80년대 십대들의 모습을 ‘자살’이라는 무거운 모티브로 극화해 개봉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황기성사단 제작, 김성홍 각본, 강우석 감독의 이 영화는 배우 이미연  김보성의 데뷔작이며 이덕화 최수지 등이 공연했다. 영화의 흥행 성공에 이어 출판된 영상소설은 수십만 부가 팔려 역시 화제를 모았다.

본지에서는 80년대 대형 히트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를 영화 스틸과 함께 격일 연재한다.-편집자


출연

이미연-이은주, 김보성(당시 이름 허석)-김봉구, 최수훈-안천재, 이덕화-박길호, 최수지-강선생, 전운-교장, 최주봉-담임, 정혜선-은주어머니, 이해룡-은주아버지


수상

제26회 백상예술대상(1990) 남녀 신인연기상(김보성, 이미연), 시나리오상(김성홍)



30. 은주, 충격의 17등




진수는 점점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친구가 무슨 말을 하면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을 것도, 대뜸 화부터 나고 대꾸도 곱게 안 나왔다. 공부 하랴, 그림 그리랴, 바쁘고 힘든 탓이기도 했고 마음이 다급해져 모든 것이 짜증스러운 탓도 있는 듯했다.

학기말 고사 마지막 날 아침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학교에 가자 짝은 대뜸 이렇게 말했다.

「너 공부 많이 했구나? 기집애, 눈이 충혈된 것 좀 봐. 밤 새우면서 했구나?」

진수는 속이 다 뒤집히는 걸 간신히 참았다. 싸우고 시험 봤다간 온통 실수만 저지를 것이 뻔했다. 전에도 시험 때면 늘 듣는 말이었고 자기도 친구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많은데 왜 그 말을 듣고 그렇게 화가 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시험 끝나고 종례 시간에 진수는 또 화나는 일을 겪었다

「내일 장학사 오는 거 알죠? 그래서 내일 특활 합니다. 각 반별로 내일 가져 올 특활 준비물은 교문 옆의 게시판에 붙인답니다. 집에 가면서 보고 가도록.」

그 말을 듣고 진수 짝은 진수의 등을 두드렸다.

「몇 년 만의 특활이냐, 와우, 와우. 근데 진수야 나 특활 어느 반이지? 학기 초에 나 어느 반에 들었었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진수는 그만 담임선생이 있는 것도 잊고 소리를 꽥 질렀다. 그렇게 화가 날 수가 없었다.

「진수야, 왜 그래?」

짝은 놀라서 진수를 쳐다보며 물었다. 담임도 무슨 일인가 해서 진수 곁으로 왔다.

「무슨 일이니?」

「얘가 자기 특활 어느 반인지 모른대요.」

진수가 대답하자 여기저기서 <나두> <나두 몰라, 잊어 먹었어>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별 수 없이 담임선생은 교무실에 가서 특활 일지를 가져 왔다.

「박미란 문예부, 송지선 원예부, 김효순 서예부, 이현수 합창부... 김진수 사진부...」

진수는 <아 참> 하고 중얼거렸다. 1,2학년 때 미술부여서 지금도 자기가 미술부에 속한 걸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담임선생님이 불러 주는 걸 듣고 나서야 학기 초에 사진이 배우고 싶어 사진부에 들겠다고 한 것이 비로소 생각이 났다. 진수 짝은 진수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이자 뒤에 앉은 친구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야 너 씨엠이 무슨 말의 약자인지 알어?」

「그것도 몰라? 선전이지 뭐. 씨엠송이 광고 노래잖아. 커머셜 메시지, 발음 좋고.」

「웃기고 있네. CM은 센티미터의 약자야. 잘난 척하기는.」

「뭐? 센티미터? 히히.」

진수는 그런 친구들이 또 이유없이 싫어졌다.

「어휴, 푼수들. 어휴, 지겨워, 지겨워. 얼른 연합고사보고 졸업을 해야지, 지겨워 못 살겠네.」

진수가 중얼거리는 것도 못 듣고 진수 짝은 수다 떠느라 바빴다.

「야 너 신문 봤니? 선생님들이 노조 만든다는 거.」

「교원 노조? 우리 담임도 가입할까?」

「야, 거기 가입하면 학교에서 짤린다는데 가입하겠냐?」

「그런 누가 가입해?」

「나도 몰라. 근데 교원 노조 생기면 선생님들이 데모하는 거니? 월급 인상, 보충 거부, 막 이렇게 피켓 들고 하는거야?」

「선생님들이 그렇게야 할까? 모르지, 파업해서 우리 한 일주일씩 방학할지도... 그럼 우리 단체로 놀러 가자.」

「우리 엄마는 텔레비전에 머리띠 두르고 농성하는 것만 나오면 죽일 놈이라고 욕하는데 잘하다간 우리 엄마가 우리 선생님한테도 욕하겠다.」

어느새 담임선생은 반 아이들의 특활반 배정을 끝냈다. 아이들은 인사를 하자마자 우르르 게시판을 보려고 달려 나갔다.


월요일 아침에 천재는 머리가 어지러운 걸 참고 양호실로 갔다. 비장한 표정으로 양호실 문을 두드렸다. 월요일이라 새로 꽃을 사온 강 선생은 꽃을 손질하다 천재를 맞이하게 되었다.

「좀 괜찮니?」

강 선생이 활짝 웃었는데도 천재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한 가지 물어 볼 게 있습니다.」

「뭔데?」

강 선생은 밝게 반문했다. 천재에게 진지하게 대해 줄 수가 없었다. 또 무슨 엉뚱한 짓을 할지 몰랐다.

「저 괜찮은 놈이죠?」

강 선생은 천재의 의도가 뭘까, 잠시 의아스러웠지만 가볍게 대답하기로 했다.

「그럼. 다만 상대를 잘못 선택했을 뿐이지.」

「그 말이 듣고 싶었어요. 안녕히 계세요.」

천재는 인사를 꾸벅 하고 미련 없이 돌아서서 문으로 갔다. 양호 선생은 그런 천재가 불쌍하기도 하고 자신이 뭘 잘못한 것만 같아 미안하기도 했지만 뭐라고 위로할 수도 없었다. 문을 열고 나서던 천재는 돌아서서 말했다.

「선생님, 박길호 선생님도 괜찮은 남자예요.」

천재가 문을 나서자 양호 선생은 가만히 웃었다.



양호실에서 나온 천재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펑펑 나왔다. 어느 깊은 산에 들어가 머리 깎고 중이라도 되고 싶은 심정으로 눈물을 훔치며 복도를 따라 걸었다. 세상에 자기 보다 더 불행한 남자는 없을 것 같았다.

「이봐요, 학생.」

천재는 눈물로 범벅된 채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놀랍게도 거기엔 양호 선생 뺨치게 예쁜 여자가 서 있었다.

「학생, 울고 있네?」

그 여자는 동정 어린 눈빛으로 천재를 쳐다보았다. 천재는 가슴이 찡했다. 얼른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아녜요. 눈에 먼지가 들어갔어요.」

「그랬군. 저, 교장실이 어디지?」

「교장실이오?」

「으응.」

천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여자의 아래위를 재빠르게 훑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학부형은 아니었다.

「혹시 양호 선생님이세요?」

「아니, 난 영어 교사야.」

「그래요?」

천재는 입이 양가로 쭉 올라갔다.

「절 따라오세요.」

신바람이 나서 앞장선 천재를 신임 여교사가 뒤따라갔다.

교장실이란 팻말이 보이자 여교사는 멈춰 섰다. 천재는 제일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깁니다.」

「고마워, 학생.」

「저, 그런데 선생님, 혹시 박길호 선생님 아세요?」

「글쎄, 모르겠는데. 이 학교 선생님이신가?」

천재는 더욱 진지하게 말했다.

「조심하셔야 될 겁니다. 질이 안 좋은 남잡니다. 여교사 킬러예요.」

천재는 돌아서서 교실로 가면서 내일 카메라를 가져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틀 뒤 현관 앞 게시판에 성적과 석차가 나붙었다. 여태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다. 수학 선생의 제안으로 생긴 새로운 풍습이었다. 아이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더 분발해서 공부하도록 자극을 준다는 것이 그 목표였다. 등교하면서 학생들은 게시판에서 자기 이름을 찾느라 바빴다. 어차피 종례 시간에 성적표를 받게 되지만 누가 내 위고, 누가 내 아래인지 알고 싶은 궁금증을 참을 수 있는 아이는 없었다. 내 위치를 나 스스로 확인 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내 위와 아래를 확인해야 내 위치를 알 수 있었다. 나의 향상이란 내 위가 줄고 내 밑이 늘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스스로를 유지하고 있어도 위가 늘고 밑이 줄면 난 하락한 것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은주는 두려운 마음으로 게시판에 다가섰다. <1학기말 고사 2학년 석차>라고 쓰여진 종이를 쳐다보았다. 맨 위에는 낯선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은주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다. 2등 칸에는 중배의 이름이 있었다. 3등, 4등... 은주는 자기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은주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더 밑으로 시선을 내렸다. 17등. 17등에 은주의 이름이 있었다. 은주는 빳빳이 서서 17이란 숫자와 자기의 이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보아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려는 아이들이 계속 들이닥쳐 은주는 휘청거리며 떠밀려 나왔다. 벽보처럼 붙은 석차 명단은 아이들의 머리에 가려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은주의 눈에는 17이란 숫자가 너무나 뚜렷이 보였다. 열일곱 살, 십칠 등. 열일곱과 십칠이라는 두 단어는 전혀 연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천천히 교실로 올라갔다. 이미 소연이는 등수와 성적에 대해 고민하기를 끝내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연지야, 너 경상도 말로 <할머니 어서 오세요>를 석 자로 뭐라 그러는 줄 알아?」

「몰라, 난 3대째 서울 토박이야.」

「우리 민족 말인데 알아야지. 모르면 배워야지. 할멘교.」

「할맨교? 히히.」

소연과 연지는 책상을 두들기며 웃어댔다. 은주는 그들이 다른 세상에 사는 아이들 같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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