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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9/11/10 00:00:00  임정진




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31)
강우석 감독 이미연 주연의 80년대 히트작 / 임정진 작


 

이 영상소설은 1989년 개봉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소설화한 것이다.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입시 현실에 찌들어 꿈을 잃어가는 80년대 십대들의 모습을 ‘자살’이라는 무거운 모티브로 극화해 개봉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황기성사단 제작, 김성홍 각본, 강우석 감독의 이 영화는 배우 이미연  김보성의 데뷔작이며 이덕화 최수지 등이 공연했다. 영화의 흥행 성공에 이어 출판된 영상소설은 수십만 부가 팔려 역시 화제를 모았다.

본지에서는 80년대 대형 히트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를 영화 스틸과 함께 격일 연재한다.-편집자


출연

이미연-이은주, 김보성(당시 이름 허석)-김봉구, 최수훈-안천재, 이덕화-박길호, 최수지-강선생, 전운-교장, 최주봉-담임, 정혜선-은주어머니, 이해룡-은주아버지


수상

제26회 백상예술대상(1990) 남녀 신인연기상(김보성, 이미연), 시나리오상(김성홍)



31. 봉구, 기적의 328등



봉구는 지각할까 걱정하며 헐레벌떡 현관으로 들어서다 석차 명단을 보았다. 봉구는 습관대로 밑에서부터 이름을 확인해 갔다. 꽤 올라갔는데도 이름이 보이지 않자 봉구는 초조해졌다. 밑에 이름이 있는 걸 놓치고 시선이 위로 올라간 것이 아닌가 싶어서...

다행히도 봉구의 이름은 허리를 넘어선 상반신 쪽에서 발견되었다. 328등.

「야호. 됐다, 됐어.」

한 손을 번쩍 들어 휘휘 돌리며 좋아하는 봉구를 달중이가 다가와 툭 쳤다.

「야, 야 남이 보면 전교 10등이나 한 줄 알겠어. 조용히 가. 남세스럽게, 이게 무슨 추태냐?」

봉구는 달중에게 끌려 교실로 왔다.

「야, 천재야, 천재야, 빅뉴스, 그레이트 빅뉴스.」

「그래 임마, 빅뉴스다. 너도 봤어?」

봉구는 천재도 자기 석차에 대해 말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럼. 넌 어떠니? 미처 니 껀 못 봤다. 바빠서.」

「내 꺼? 나 이제 인생관 바꿨어.」

「그래? 그럼 천재 너도 잘된 거야? 축하한다, 임마.」

「그나저나 그럼 이제 너랑 나랑 라이벌 된 거냐? 너 은주는 어떡하고?」

「은주? 은주가 나랑 상대가 되냐?」

「뭐야? 그럼 너 은주는 이제 포기야?」

「내가 언제 은주와 라이벌이 될 꿈이나 꾸었냐? 내가 한 100등 안에만 들어도 몰라.」

「100등? 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그제서야 천재는 봉구가 엉뚱한 소리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천재야 너아말로 왜 그래? 내가 뭐 은주하고 성적 대결이 돼야 포기고말고가 있지.」

「성적? 그러면 너 새로 온 영어 선생 얘기 하는 거 아냐?」

봉구는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영어 선생?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너 성적 올랐단 얘기 아냐?」

「성적이 왜 올라? 나 양호 선생 포기했다구. 영어 선생이 새로 왔는데 최수지 플라스 부룩 쉴즈 플라스 이혜숙 거기다 양념으로 소피 마르소 섞은 여자야, 죽여, 죽여.」

「영어 선생? 난 성적 얘기 한 거였는데 웬 영어 선생 얘기야? 헷갈리게.」

「아무튼 이따 둘째 시간에 봐. 끝내 줘.」


둘째 시간이 되어 새로 부임한 영어 선생이 들어왔다.

「만나서 반가워요. Gold to meet you. 내 이름은 홍경숙이에요. My name is Hong. 수업 중에는 되도록 영어로 많이 말하도록 하세요. 오늘은 진도 안 나가요. 내가 준비를 못 해왔어요. 몇 학년을 맡게 될는지 몰라서. 질문 있으면 하세요. Let's have free-talking time. Have you any question?」

아이들은 모두 멍하니 홍 선생을 쳐다보다, 짝꿍을 쳐다 보다, 마침내 책상을 뚫어지게 쳐다보게 되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홍 선생의 입심에 우선 놀랐고 정확하고 부드러운 발음에도 기가 죽었다. 뭘 물어 보고 싶어도 영어로 물어 보랄 것 같아 선뜻 손을 들 수가 없었다.

「질문 없어요? 그만 갈까요?」

「No. No. Don't go! Miss Hong.」

고함을 질러 댄 건 천재였다. 아이들은 놀라고 감탄스런 눈으로 천재를 쳐다보았다.

「으와, 쟤가 영어로 했어. 영어로.」

봉구는 천재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얌마, 선생님한테 미스 홍이 뭐야? 네 비서냐?」

그러나 정작 홍 선생은 기뻐하는 눈치였다.

「Thank you. What's your family name?」

「Me? family name?」

천재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누군가 작게 말해 주었다. <성이 뭐냐는 소리야> 라고.

「Oh, Yeh. My family name is Ahn.」

「Mr. Ahn. What do you want to know?」

천재는 눈치로 홍 선생이 질문을 하란 소리를 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You have no husband. Yes? No?」

「I'm single」

「싱글? 야, 봉구야. 싱글이 뭐냐? 싱글 침대 쓴단 소리야?」

「그런가 봐.」

봉구가 자신 없게 대답했는데도 천재는 신이 났다. 그럼, 남편 없단 소리구나.

「OK. OK. Thank you very much. I'm single, too. I'm a gentle-man. And I'm very kind. You know? I'm very happy. I'm... I'm...」

천재가 떠듬거리며 수선을 피우자, 봉구는 슬그머니 천재 옷소매를 잡아 당겼다.

「야, 야. 밑천 드러나기 전에 그만둬. 됐어. 잘했어.」

천재는 봉구의 만류에 이성을 되찾고 머리를 긁적긁적 긁었다.

「굳. 아주 훌륭한 태도예요. 한국 사람이 미국 사람처럼 영어를 잘하려면 얼마나 공부하면 될 것 같아요? 잘하려고만 생각하고 그때까지는 입 다물고 있어 봐요. 평생 공부해도 말 한 마디 못 하고 말아요. 미스터 안처럼 다소 서투르더라도 용감히 입을 열고 말을 시작해야 돼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여 서로 의사를 소통하는 게 언어의 역할이잖아요? 완벽하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지 마세요. 가능한 표현들을 사용해 의사를 밝히시면 돼요. 미스터 안, 오늘 아주 훌륭했어요.」

천재는 뜻밖에 칭찬까지 받자 황홀해 기절할 지경이었다.

「오늘은 질문도 별로 없으니 제가 몇 마디하고 나가죠, 괜찮겠죠? 외국어는 많이 알수록 유리해요. 그렇지만 국어를 못하는 사람은 외국어도 못해요. 우리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 영어로 하면 갑자기 좋은 표현이 튀어나올 것 같아요? 언어의 본질은 다 마찬가지예요. 생각이 있어야 말이 나오는 거예요. 영어는 어디까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에요. 그걸 분명히 아셔야 해요. 무역을 하기 위해 영어가 필요한 거고, 연구를 하기 위해 자료를 읽으려면 영어를 알면 편리한 거고, 영화를 볼 때 자막을 읽으려면 바쁘니까 그냥 영어로 들어서 이해하면 더 영화를 잘 볼 수 있죠. 사실 난 영화가 좋아서 영문과 간 사람이에요. 자막 좀 안 읽고 주인공 얼굴만 열심히 보고 싶어서. 그러니까 영어를 잘한다고 잘난 것은 아니죠. 다만 편리하게 사는 데 도움이 되는 거예요. 영어든 국어든 말을 익혀서 사고를 넓히는 것이 중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영어책 쭉 훑어보면서 제 말 들어보세요. 영어 책에 나오는 집 보세요. 그림은 소박한 것 같지만 우리 수준으로 보면 저택이에요. 정원, 부엌, 침실, 거실, 계단, 복도, 목욕탕, 지하실, 놀이방 다 갖춘 집에서 사는 사람, 이 반에 몇 명 있어요? 그리고 여기서 사는 한국 남자애 보세요. 여자 친구와 건전한 이성 교제 하고 생일파티 하고 할아버지는 멋있고 깨끗한 농장을 가지고 있죠? 취미는 수영이고 이 애의 부모님은 공부하란 얘기는 한번도 하지 않아요. 이 애가 다니는 학교는 모든 시설이 완벽하고 한 반에 20명이나 될까, 그 정도 학생밖에 보이지 않죠? 그럼 미국 아이 보세요. 친절하고 잘생기고 예의바르죠? 흑인은 잘 나오지도 않아요. 미국엔 흑인도 많이 살아요. 그런데 교과서 보면 미국엔 백인만 사는 것 같아요.」

홍 선생은 잠시 말을 끊고 아이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아이들은 그동안 끼고 살았던 영어책을 처음 보는 것인 양 뒤적이고 있었다. 영어책에서는 단어, 숙어, 가정법 용법만 있는 줄 알았지, 글의 내용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영어책에 나온 주인공들은 너무나 귀족적인 생활만 하고 있었다. 시험 때문에 고민하는 아이도 없었고, 좁은 집에서 많은 식구가 사는 일도 없었고, 취직을 못 해 고민하는 삼촌도 없었다. 홍 선생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천재는 감격하고 있었다. 홍 선생이 영화를 좋아한다고 한 얘기가 자기로 향한 사랑의 고백쯤으로 들려 왔다. 벌써 뭔가 통하고 있었다.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홍 선생은 아마 내 영화 작업에 기꺼이 참여할 거야. 숨어서 찍을 필요없이 당당하게 연출까지 해가며 멋지게 찍어야지. 우와 째진다. 째져.)

「이 영어 교과서를 신주 단지처럼 모시고 있는 여러분들은 미국에 대해 헛된 호기심을 가지게 되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해요. 미국은 미국 나름대로 많은 문제가 있는 나라이지만 영어 책에는 그런 얘기를 빼놓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영어는 미국에서만 쓰는 게 아녜요. 인도 사람도 영어 쓰고 홍콩에서도 영어 쓰고 뉴질랜드, 영국에서도 영어 써요. 스페인 사람 만나도 영어로 의사소통 하게 됩니다. 소련인도 해외 나오면 영어로 말해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영어는 잘 해야 해요. 책의 내용이 너무 현실과 동떨어졌다고 영어 그 자체를 배격해선 안되죠. 난 영어 선생이에요. 앞으로 영어 못하는 사람은 가만히 놓아두지 않아요. 각오하세요. 열심히 가르쳤는데 열심히 배우지 않는 사람을 두고 볼 순 없죠? 다음 시간부터 그날 배운 건, 그날 다 암기해야 해요. 매시간 5분 테스트 합니다. 알았죠?」

(매 시간마다 시험? 아니 생긴 건 천사 같은데 하는 짓은 도깨비네.)

천재는 홍 선생을 다시 쳐다보았다. 여전히 예뻤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봉구의 목은 빳빳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어머니를 찾았다.

「엄마, 빨리 나와 보세요. 소자 돌아왔습니다.」

베란다에서 빨래를 걷던 봉구 어머니는 흘낏 봉구를 보고는 계속 일을 했다.

「냉장고에 먹을 거 넣어 놨다. 꺼내 먹어.」

「그게 아냐, 엄마. 빨리 나와 봐.」

봉구는 어머니에게서 빨래를 뺏어 마루에 팽개치고 어머니를 소파에 앉혔다.

「왜 그래? 또 강도 당했어?」

「아니, 짜라짠짠- 이걸 보시라.」

봉구는 성적표를 척 내밀었다.

「성적표냐? 어디 보자.」

성적표를 살펴본 어머니는 눈을 깜빡이며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다.

「328등? 이거 정말이냐? 너 혹시 컨닝했니? 아니, 요새 성적표 변조해 주는 데가 있다던데 너 이거 고쳐 온 거 아냐?」

「엄만, 날 그렇게 못 믿고 어떻게 아들이라고 불러요? 내가 뭐 하러 그런 짓을 해요? 하루도 못 가 들통날 일을 할 만큼 어리석은 봉구가 아닙니다.」

「그래도, 성적이 너무 많이 올랐으니까 믿을 수가 없다, 얘. 호호.」

「그렇게 못 믿으면 우리 담임한테 전화로 확인해 봐. 제기랄.」

봉구는 정화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봉구에게서 수화기를 뺏어 내려놓으며 다시 한 번 성적표를 들여다보았다.

「됐어. 담임선생님한테 전화 안 해도 돼. 아구 기특해라. 가만있자. 아버지한테 전화해서 빨리 오시라구 해야지. 슈퍼에 다시 갔다 와야겠다. 탕수육이라도 좀 만들어 줄게. 이게 웬 사건이냐, 그래?」

어머니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혼자 수선을 피웠다. 봉구는 그런 어머니를 보며 느긋하게 자기 방에 들어가 은주에게 보낼 편지를 구상했다.

그날 저녁 식탁은 설날 이래로 가장 풍성한 식탁이었다. 봉구는 아귀처럼 먹어댔다. 칭찬받으며 밥을 먹으니까 먹는 즉시로 소화가 쫙쫙 되는 기분이었다.

「인석아, 진작 좀 그렇게 공부하자. 이 에미 진짜 살맛난다. 허리가 다 안 아퍼. 내일은 침 맞으러 안 가도 되겠어. 아이구, 기특한 것. 많이 먹어.」

아버지도 어머니 못지않게 싱글벙글이었다.

「거참 신통하다. 다른 애들이 다 잠만 잤나? 어떻게 한번에 10등도 아니고 100등씩이나 올랐어?」

「아버지도 참, 보통이죠 뭐. 제가 그동안 머리를 좀 아꼈었걸랑요. 이번엔 머리를 팍팍 썼죠. 원래 머리 좋은 애들이 한번 하면 이렇게 겁나게 해요.」

「이젠 니 엄마 머리 싸매고 눕는 꼴 안 봐도 되겠구나. 나도 좀 다리 뻗고 편히 자겠다. 고맙다 봉구야.」

「원참 당신두. 당신이 언제 봉구 성적 걱정 하느라 잠 못 잔 적 있어요?」

봉구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부모님에게 부탁할 것이 있었다.

「봉구야, 더 먹어.」

「아뇨 됐어요. 많이 먹었어요. 저...」

「뭔데? 말해 봐.」

「아빠 부탁 하나 들어주시겠어요?」

「뭐든지 말만 해라. 네가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아빠도 가만있을 수 없지.」

「한 가지 꼭 살 게 있거든요. 돈 좀 주세요.」

「그래. 줘야지. 주고말고.」

다른 때 같으면 돈 준다고 타박을 할 어머니도 곁에서 웃고만 있었다. 봉구는 너무너무 신이 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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