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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9/11/16 00:00:00  임정진




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33)
강우석 감독 이미연 주연의 80년대 히트작 / 임정진 작


 

이 영상소설은 1989년 개봉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소설화한 것이다.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입시 현실에 찌들어 꿈을 잃어가는 80년대 십대들의 모습을 ‘자살’이라는 무거운 모티브로 극화해 개봉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황기성사단 제작, 김성홍 각본, 강우석 감독의 이 영화는 배우 이미연  김보성의 데뷔작이며 이덕화 최수지 등이 공연했다. 영화의 흥행 성공에 이어 출판된 영상소설은 수십만 부가 팔려 역시 화제를 모았다.

본지에서는 80년대 대형 히트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를 영화 스틸과 함께 격일 연재한다.-편집자


출연

이미연-이은주, 김보성(당시 이름 허석)-김봉구, 최수훈-안천재, 이덕화-박길호, 최수지-강선생, 전운-교장, 최주봉-담임, 정혜선-은주어머니, 이해룡-은주아버지


수상

제26회 백상예술대상(1990) 남녀 신인연기상(김보성, 이미연), 시나리오상(김성홍)



33.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



봉구는 도서관에서 빌려 온 시집을 들추며 은주의 생일카드에 쓸 멋진 말을 찾아보았다. 그러다 자기 맘을 대변하고 있는 시를 발견했다.



Y라는 이름의 작은 섬이

내 마음 속에 있다


한 사람도 표류한 적이 없는

無人島

거기 닿으려고


상륙 허가증도 없는 一等水兵 하나가

매일 밤 노저어 간다


사랑의 이름표를 달고


(이세룡)


(이거 완전히 내 얘기잖아? 완전 족집게야. 히히.)

봉구는 포장해 둔 선물을 보고 또 한 번 벌죽벌죽 웃었다. 봉구는 은주를 생각하면 자꾸만 웃음이 나와 졸립지도 않았다. Y는 은주고 일등 수병은 나. 카드에 쓰려니 너무 적나라한 것 같아 쑥스러웠다. 좀더 은근한 걸로 찾아보기로 했다. 시집을 뒤적이며 봉구는 그동안 이렇게 좋은 시가 있다는 걸 모르고 살았다는 게 한심스럽기만 했다. 시라는 건 국어 선생님이 토막 쳐서 양념 치고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매달고 접시에 담아 주는 걸로만 알았다. 토막도 안치고 지은이가 무슨 파인지, 무슨 동인지도 모르고 설명도 없이 맨송맨송하게 읽어 봐도 구절구절 감칠맛 나는 시가 많았다. 봉구는 놀랍고 신기하기만 했다. 몇 개의 시를 골라 놓고 봉구는 몇 번이나 되읽어 보며 비교를 하다 간신히 하나를 골라냈다. 김태준이란 시인이 쓴 시인데 봉구의 심정을 은근하게 표현해 준 것 같아 맘에 들었다.


봄날의 일


뜻모를 그리움이 내 가슴을 흔들었다.

가슴이 흔들릴 때마다

온몸이 달았다.


혼자 있어도 부끄러운

내 나이

열일곱

말이 없는 수평선을 바라보면

바다는 숫제

돌아가라 돌아가라 파도를 밀어오고

나는 자꾸

고개를 내저었다


내 나이

그때 열일곱


연변에 날아온 갈매기만 보아도

나는 웬일인지

멀리 날고 싶었다


봉구는 카드에 실수할까 봐 우선 연습장에 몇 번 글씨 연습을 했다. 그랬는데도 카드에 쓰려니 손이 자꾸 후들거려 글씨가 잘 써지지 않았다.

(봉구야 너 왜 이러니? 아니 이거 하나 똑바로 못 쓰면서 어떻게 은주와 사귀니?)

봉구는 자신에게 야단을 치면서 겨우 시를 베껴 썼다. 그리고 맨 밑줄에 <생일 축하하며, 봉구가>라고 적었다. 카드까지 다 적었는데도 좋아서 잠이 오지 않아 이불을 덮고 한참을 싱글거렸다.


은주 어머니는 두 시간이 지나도 은주가 오지 않자 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남편이 무슨 소리를 할까 두려워 은주를 찾아 나설 수도 없었다. 은주 아버지가 이윽고 서재에 나와 은주 어머니를 흘끗 보더니 물었다.

「미국 애들한테 돈 부쳤소? 비행기값이랑 이삿짐 부치려면 돈이 꽤 들 텐데. 넉넉히 보내줘요.」

「내일 그렇지 않아도 은행에 가려고 했어요. 다음달 초순에 오겠다고 하던데...」

「나 먼저 들어가겠소.」

은주 아버지는 어머니가 은주 뒷바라지하느라 같이 밤을 밝히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먼저 안방으로 들어갔다. 은주 어머니는 남편이 방으로 들어가자 안도의 한숨을 내리쉬었다.

(아니, 근데 얘가 어딜 간 거야. 그 성적 가지고 어떻게 법대 갈려구, 더 분발해서 공부할 생각은 않구서...)

어머니는 베란다로 나가 내려다봤지만 텅 빈 놀이터만 보일 뿐이었다.

은주는 울다 지쳐 울음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밑을 내려다보았다.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밤이 늦어 아파트 단지 내에는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가로등의 불빛이 더욱 슬프게 보였다. 일요일에 봉구와 함께 가로등 밑에 서 있을 때의 그 불빛이 아니었다. 훨씬 푸르고 차가웠다. 한기가 느껴졌다. 갑자기 어둠이 무서웠다. 은주는 집으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텅 빈 복도를 걸어가려니 복도가 길고 길게만 느껴졌다. 집 앞까지 왔지만 벨을 누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손잡이와 벨, 홋수를 적은 팻말, 밖을 내다보게 만든 조그만 구멍을 번갈아 보며 망설였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띵똥>

벨소리가 그렇게 큰 줄은 미처 몰랐었다. 은주는 벨소리에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려 다시 가려고 했다. 그러나 급히 문을 열고 나온 어머니가 은주를 보았다.

「뭐 하구 있어?」

어머니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은주는 어쩔 줄 모르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가만히 서 있었다.

「못나게 굴지 말고 빨리 들어와.」

은주는 고개를 숙이고 들어섰다. 어머니가 들어오라고 말해 주어서 고맙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나가라고, 너같이 공부 못하는 딸은 필요 없다고 했으면 어쩔 뻔했나 생각하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은주는 성적표를 집어 들고 책상에 앉았다. 다시 한 번 열어 보았다. 900명 중에서 17등. 반에서 3등. 지난번보다 총점에서 7점이 떨어졌다. 2문제를 더 틀린 것이었다. 지난번보다 2문제 더 틀렸다고 은주는 죄인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부모님에게서.

은주는 공부할 기운이 없었다. 공부할 마음도 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갖다 놓은 주스는 입도 대지 않고 그냥 두었다. 책상에 엎드렸다. 책상은 자석 같았다. 은주의 가슴과 팔과 머리를 흡수하듯 안아 주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자 은주는 책꽂이에서 일기장을 찾아내었다. 중3 겨울방학 때 마지막으로 쓰고 그동안 한번도 써보지 못한 일기장이었다.

은주는 빈곳을 펼쳤다. 그리곤 봉구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어 갔다.


봉구야,

널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가벼워진다. 넌 나에게 사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어. 넌 나에게 사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어.

난 말이야, 난 1등 같은 것이 싫은데...

앉아서 공부만 하는 그런 학생은 싫어. 난 꿈이 따로 있어. 난 친구가 필요해.

난 남을 사랑하며 좀 여유있게 꿈을 가득 안고 친구와 살고 싶은데, 이 모든 것은 우리 엄마가 싫어하는 것이지.

난 인간인데.

난 친구를 좋아할 수도 있고 헤어짐에 울 수도 있는 사람인데 엄마는 나한테 친구가 있는 걸 무척 싫어해서 어떤 땐 나보고 너 혼자 다니라고 하기까지 하는 거야. 아마 널 만난 걸 알았더라면 두들겨 맞았을 거야.

너무나 모순이다, 모순. 세상은 경쟁, 경쟁, 공부, 공부. 아니, 대학! 대학!

순수한 공부를 위해 하는 공부가 아닌, 졸업장이라는 쪽지 하나 타서 고개 들고 다니려고 하는 공부. 천만 번 해봐야 그게 무슨 소용 있니?

그렇게 공부해서 하는 일이라고는 자기 이익만을 위한 거야. 그저 종이에다 글 하나 써서 <박사>라고 거들먹거리면서 나라와 사회를 위해서는 눈곱만치도 힘스지도 않아. 외국에서 하는 대로 따라 하는 박사 따위.

봉구야.

공부만 해서 행복한 건 아니잖아?

공부만 한다고 잘난 것도 아니잖아?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해 이 사회에 봉사하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면 그게 보람 있고 행복한 거잖아?

어쨌든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면 보람이잖아.

꼭 돈 벌고 명예가 높은 것이 행복한 게 아니잖아. 나만 그렇게 살면 뭘 해?

나만 편하면 뭘 해? 왜 그런 삶을 나에게 자꾸 주려 하는 거야? 왜? 왜?

봉구야, 난 어쩌면 좋니?


넋두리처럼 생각나는 대로 낙서를 하다 은주는 창문을 열었다. 앞 동에도 여러 집에 불이 켜져 있었다. 은주는 그 불빛 아래에 다 자기처럼 불행한 아이들이 울고 있을 것만 같아 더 슬퍼졌다. 방안은 조용하여 다섯 시면 요란하게 울리는 탁상시계와 초침 소리가 은주 가슴속까지 떨리게 크게 들렸다.

째칵. 째칵. 째칵.

시계를 보았다. 어느덧 두 시가 되어 있었다. 은주는 자신이 불쌍하고 엄마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계속 숨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좋을지는 몰랐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되는지 가르쳐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방안이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은주는 방문을 열고 나왔다. 베란다에도 나가 서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안방에 소리가 들릴까 싶어 조용조용 거실로 나왔다.

<앗!>

은주는 자기 입을 얼른 틀어막았다. 작은 스탠드를 켜고 어머니가 책을 보고 있었다.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꼿꼿한 그 자세로 앉아 있는 어머니가 유령 같아 보였다. 모퉁이에 서 있는 은주를 쳐다보는 은주 어머니의 시선은 어느때보다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은주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다 후다닥 자기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문에 기대어 섰다. 은주의 심장은 심하게 고동쳤다. 어떤 시험을 볼 때도 그처럼 심장이 격렬하게 뛰는 것을 느껴 본적이 없었다. 은주는 가슴에 손을 얹고 잠시 진정하는 듯 했으나 책상에 앉아 책꽂이에 꽂힌 책을 보자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후우-후우-」

은주는 거칠게 숨을 쉬었다. 방안을 왔다갔다하며 자신을 달래었다.

(아냐 그럴 순 없어. 난 엄마를 용서해야 돼. 내 인생을 지켜야 해.)

그렇게 생각하려 노력했지만 가슴속에선 더 큰 소리가 들려 왔다.

(이렇게 살아서 뭐 해. 사는 게 뭔데. 죽는 것보다 나은 것이 뭐가 있어.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내가 택할 수 있는 행복은 어디에 있는 거야?)

은주는 입술을 꼭 깨물고 낙서장에 빠르게 써내려갔다. 시간이 없었다. 날이 밝으면 자기의 결심이 변할 것 같아 두려웠다. 마음이 급해 글씨가 잘 써지지 않아 마구 흘려썼다.



난 로봇도 아니고

인형도 아니고

돌멩이처럼 감정이 없는 물건도 아니다. 밟히다 밟히다, 소중한 내 삶의 인생관이나 가치관까지 밟혀 버릴 땐 난 그 이상 참지 못하고 이렇게 떤다. 하지만 엄마, 사랑하는 우리 엄마이기 때문에... 아, 차라리 미워지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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