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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9/12/21 00:00:00  임정진




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34) <끝>
강우석 감독 이미연 주연의 80년대 히트작 / 임정진 작


 

이 영상소설은 1989년 개봉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소설화한 것이다.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입시 현실에 찌들어 꿈을 잃어가는 80년대 십대들의 모습을 ‘자살’이라는 무거운 모티브로 극화해 개봉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황기성사단 제작, 김성홍 각본, 강우석 감독의 이 영화는 배우 이미연  김보성의 데뷔작이며 이덕화 최수지 등이 공연했다. 영화의 흥행 성공에 이어 출판된 영상소설은 수십만 부가 팔려 역시 화제를 모았다.

본지에서는 80년대 대형 히트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를 영화 스틸과 함께 격일 연재한다.-편집자


출연

이미연-이은주, 김보성(당시 이름 허석)-김봉구, 최수훈-안천재, 이덕화-박길호, 최수지-강선생, 전운-교장, 최주봉-담임, 정혜선-은주어머니, 이해룡-은주아버지


수상

제26회 백상예술대상(1990) 남녀 신인연기상(김보성, 이미연), 시나리오상(김성홍)



34. 은주야 안녕, 하늘에선 행복해야 해



사람들은 조간신문을 읽고 신선한 우유를 마신 후, 버스를 타고 혹은 전철을 타고 일터로 향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활기찬 아침이었다.

봉구네 교실도 여느 아침처럼 대충 시끄럽고 대충 화기애애하고 얼마만큼 긴장되어 있었다. 조례 시간까지는 그랬다. 담임선생이 들어서는 순간 봉구는 은주 자리가 비어 있음을 알고 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제 종일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더니 병이 났나, 아니면 차 사고가 났나. 담임은 인사도 받지 않은 채 얘기를 시작했다.

「슬픈 소식이다. 금방 연락을 받아 나도 믿을 수가 없다. 이은주가 오늘 새벽에 투신자살했다.」

교실은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소연이가 제일 먼저 울음을 터뜨렸다. 봉구는 담임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늘이 만우절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천재도 놀라 봉구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봉구가 충격으로 미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여자 아이들이 하나 둘씩 울기 시작하더니 곧 교실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봉구는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죽는 것은 사는 것보다 엄숙하고 어렵고 중요한 건데, 어저께 바로 저 자리에 앉아 있던 은주가 자살했다고?

봉구는 벌떡 일어섰다.

「선생님, 은주가 왜 죽습니까? 그 앤 내일 모레면 생일이에요. 열일곱 살인데요.」

담임은 힘들게 대답했다.

「성적 비관 자살이다. 유서가 발견되었는데 거기 그렇게...」

담임은 말을 맺지 못하고 교실에서 나가버렸다. 봉구는 계속 서 있었다.

「성적 비관 자살? 유서? 자살? 왜 죽어?...」

봉구는 자꾸만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무도 봉구를 쳐다보지 않았다.


이틀이 지났다. 봉구는 자기가 밥을 먹고 학교에 나오고 밤이면 잠을 잔다는 사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은주의 몸은 차디차게 식고 그것도 모자라 병원의 냉동실에 들어가 있는데 봉구는 옷을 입고, 이불을 덮고, 걸어 다니고 있었다. 봉구는 은주가 밉고 자신이 미워서 병원에도 가지 않았다. 은주 어머니를 보아야 한다는 것도 두려웠다. 은주의 얘기가 신문에 나고 유서도 실렸다. 그것을 읽어 보니 은주 어머니가 은주의 자살을 반은 책임져야 할 사람이었다. 봉구는 은주의 죽음을 믿을 수가 없어서 병원에 가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은주의 장례식은 은주 생일에 치러지게 되었다. 봉구는 은주에게 주려고 사둔 선물을 소중히 안고 학교로 왔다.

은주가 앉아야 할 자리는 비어 있었고 은주의 책상엔 아이들이 갖다 둔 꽃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봉구는 선물을 꽃바구니 옆에 놓았다. 은주가 선물을 보고 좋아하는 얼굴이 떠올랐다. 봉구는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아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책상에 엎드렸다.

교무실에서는 직원조회가 열리고 있었다. 교사들도 오늘이 은주의 장례식이라는 걸 다 알고 있었으므로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학교 분위기가 며칠째 너무 무거웠으므로 조금 변화시켜야만 한다고 느꼈다. 교사도 학생도 하나도 의욕이 없는 이런 상태가 계속되다간 수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여러 선생님들도 잘 알다시피 수많은 학생들을 지도하다보면 소수의 이탈자는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매우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수많은 다수의 학생들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사들은 모두 숙연한 모습이었다. 은주의 담임선생은 고개를 떨구고 수첩을 만지작거렸다. 담임에게도 은주의 자살은 큰 충격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차분하고 집안도 좋은 아이라 교사들에게 싫은 소리 한 번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 은주가 이렇게 온 학교를 발칵 뒤집는 사건을 벌일 줄은 몰랐다. 성적 비관 자살이라는 신문 기사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전교 17등 했다고 자살을 한다면 학교에 남을 아이가 몇이나 있겠는가.

상담실 최 선생도 자기의 책임인 양 괴로웠다. 고민이 있을 때 상담실로 오게끔 여건을 만들이 못한 자기의 불찰로 예쁜 여학생이 자살에 이르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죽고 싶을 때 의논 상대가 되어 주지 못한 상담교사라는 자책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박 선생은 교사 모두가, 은주의 부모가 은주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다. 박 선생 자신도 살인자의 벌을 짊어져야 한다고 느꼈다. 교사직이 이렇게 부끄럽고 괴로웠던 적이 없었다.

교장 선생님의 차분한 목소리가 다시 교무실을 채웠다.

「다행히 술렁이고 있던 학생들의 분위기가 여러 선생님들의 노력으로 다소 진정되어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어 조금은 안도하고 있는 게 본인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고삐를 늦춰서는 안됩니다. 개학 첫날 우리 선생님들 전체가 약속했던 그대로, 매진하고 또 매진하여 올해도 신흥 명문으로서 확고한 위상을 정립하도록 힘써 나갑시다. 학생들에게 학력고사는 전국의 학생들이 보는 것이며 이 순간에도 다른 학교에서는 공부하느라 쉴 틈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십시오. 이상입니다.」

교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출석부를 뽑아 들고 각 교실로 흩어져 갔다.

봉구는 갑자기 생일 카드를 다시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습장에 베껴 놓았던 시를 훑어보았다. 그중 하나를 골라 깨끗한 종이에 옮겨 적었다. 천재는 봉구의 하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별에게


그대 있는 곳으로

나는 이제 갈 수 없네.

그 길 눈앞에 선하지만

가고 또 가고 싶지만

그대 후회 없으라고

여기서 멈추어 서야 하네

바람 불면

풀잎마다 떠오르는 그대 숨결 들으며

숨어 흐르는 강물처럼

조금씩 조금씩 떠나야 하네

아픈 사랑 하나 키우면서

여기서는 눈물조차 보일 수 없어

그대의 하늘 위에

구름으로 떠나야 하네.


(박영웅)


<그대 있는 곳으로 나는 이제 갈 수가 없네>를 다시 한 번 읽다가 봉구는 참고 참았던 눈물이 터져 버렸다. 종이는 눈물에 젖어 군데군데 찢어질 듯했다. 천재도 가슴이 아파 간신히 말했다.

「봉구야, 은주에게 줄 건데 그렇게 얼룩이 지면... 은주가 읽을 수가 없잖아. 이리 줘. 내가 갖다 놓을게.」

천재가 눈물을 흘리는 봉구를 대신하여 종이를 접었다. 그리고 꽃바구니 속에 꽂아 넣었다. 그런 천재를 보며 소연은 훌쩍이기 시작했다. 다들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담임선생이 들어왔다. 봉구는 담임선생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소리 죽여 울었다. 반장 준식이가 벌떡 일어섰다. 준식은 화가 난 듯 보였다.

「선생님, 오늘이 은주의 장례식입니다. 왜 우릴 장례식에 못 가게 하십니까? 은주에게 작별인사를 해야 합니다.」

「앉아.」

담임선생은 애써 차분히 말했다. 그러나 반장은 앉지 않았다.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은주의 마지막 가는 길입니다. 은주는 다시 오지 못한단 말입니다.」

절규하듯 말하는 반장에게 담임선생은 너무나 냉정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앉으라니까. 너희들 심정은 충분히 안다. 나 자신, 지금처럼 교단에 서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울 때가 없었다. 은주 아닌 내가 희생양이 되어야 했었다는 죄책감마저 든다.」

소연이 갑자기 은주의 책상에 엎드리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담임선생도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소연을 쳐다보았다.



그때 교문으로 영구차가 들어서고 있었다. 수위가 놀라 달려 나와 차를 세웠다. 은주 아버지가 차에서 내렸다. 그의 손에는 검은 테가 둘러진 은주 사진이 들려 있었다. 수위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쳐다만 보았다. 은주 아버지가 먼저 입을 떼었다.

「우리 아이 마지막 가는 길입니다. 다니던 학교, 운동장이나 한 바퀴 돌아보고 가야 은주가 편히 떠날 수 있겠습니다.」

수위는 교장실에 연락해 물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잠,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수위가 허겁지겁 다시 수위실로 들어가는데 은주 아버지는 차에 올라타더니 차를 출발시켰다. 전화기를 둔 수위는 멍하니 영구차가 들어서는 것을 바라보았다.

담임선생은 소연의 울음소리가 조금 잦아들자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우리 앞엔 나아가야 할 분명한 길이 있다. 포기하거나 절망해선 안돼. 먼저 간 은주를 대신해서라도 우린 목적지까지 가야 한다. 그 길만이 은주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은주도 여러분 모두의 밝은 미래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창가에 앉아 있던 민자가 눈물을 멈추려고 눈을 깜빡이며 창 밖을 내다보다 운동장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영구차를 보았다. 민자는 앞 뒤의 아이에게 밖을 보라고 신호했다. 곧 신호는 온 교실에 퍼졌다. 소연이 물다 말고 벌떡 일어서더니 교단을 가로질러 창에 붙어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뭐 하는 짓이야?」

담임선생이 소연에게 소리쳤으니 아이들은 하나 둘씩 창가로 다가섰다. 담임선생도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았다. 봉구는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창가에 가 있던 천재도 주먹으로 눈을 비비대며 봉구에게로 다가갔다.

「봉구야, 은죽 왔어. 생일 선물을 줘야지.」

봉구와 천재는 와락 껴안고 같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교무실에 남아 있던 몇 선생님들도 창 밖을 내다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박 선생은 책상 서랍을 열고 봉투를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그 안에는 사직서가 들어 있었다. 박 선생은 천천히 교무실을 나왔다. 부끄러워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은주 아버지는 화단에 찬란하게 피어 있는 갖가지 꽃을 보았다. 등나무 그늘 밑의 벤치를 보았다. 바람에 실려 온 흙먼지가 날리는 스탠드를 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을 보았다. 그 모든 것을 이제 은주는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영구차가 운동장을 거의 한 바퀴 다 돌 무렵엔 전교생이 창가에 붙어 서서 은주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민호는 영구차 안에서 눈을 감고도 아이들이 바라보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은주야, 아이들이 너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구나.)

민호는 은주에게 이렇게 속삭이면서, 거의 실신 상태로 쓰러진 이모를 붙잡았다.

울던 봉구는 천재가 쥐어 주는 선물을 들고 달려 나갔다.

영구차는 운동장을 다 돌고 교문을 향해 가고 있었다. 봉구는 미친 듯이 소리치며 달려갔다.

「은주야, 은주야-」

민호가 봉구를 보고 차를 세워 달라고 했다. 차가 멈추고 봉구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차 문을 열었다. 은주 아버지가 봉구를 쳐다보았다. 봉구는 선물을 은주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이건 은주의 생일 선물이에요. 이건 은주가 좋아하던 가수 노래가 든... 테이프... 은주 곁에 묻어 주세요. 꼭이요. 꼭.」

봉구는 울면서 차 문을 닫았다. 은주 아버지는 선물을 든 채, 화단 쪽으로 뛰어가는 봉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네가 봉구로구나. 은주가 고맙다고 할 거다. 고맙다, 봉구야.」

영구차는 천천히 교문을 빠져 나갔다. 봉구는 화단 쪽에 서 있다 교문이 닫히자 다시 교문으로 달려왔다.

「은주야- 안녕. 은주야- 잘 가-」

교문을 부여잡고 봉구는 멀어져 가는 영구차를 쳐다보았다. 눈물 때문에, 슬픔 때문에 은주의 마지막 길은 뿌옇기만 했다.


그대 있는 곳으로

나는 이제 갈 수 없네

그대의 하늘 위에

구름으로 떠나야 하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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