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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1/01/04 00:00:00  서영석




해병대 전우가 불러낸 복서출신 이승철의 연극 인생 30년
배우도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탤런트 이청아 아빠 / 서영석


 



【인터뷰365 서영석 이순으로 접어든 중진 연극배우 이승철. 서울 동숭동 대학로 무대의 중심인물로 30여년 활동해 온 그가 만년에 이르러 경기도립극단의 지도위원으로 옮겨가 수원의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배우 인생 2막의 열정을 다시금 불사르고 있다.

주어진 배역마다 속이 찬 원숙한 연기력으로 울림이 크고 감동이 진한 리얼리즘을 객석으로 전달하던 당당한 풍채의 배우 이승철이 대학로를 떠나 지방무대에 서게 된 것은 그의 연기 인생에 큰 변화이면서 연극계에서도 사건으로 볼 수 있다.


그에게 달라진 게 하나 더 있다. 딸 이청아가 아버지의 재능을 승계해 TV드라마의 인기 탤런트로 떠올라 '청아의 아버지'로도 보람을 느끼며 산다.

차갑지만 슬프도록 맑고 고운 겨울 날 하오 그를 만나려고 수원으로 갔을 때 그는 원작 인물의 국가인 러시아 연극계의 공훈 연출가가 직접 연출해 화제에 오른 <닥터 체홉의 사랑은>이란 연극의 공연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인간에게 영원한 마음의 안식처는 고향이라고 합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예술인들에게는 향수의 정이 더 깊다고도 하는데 고향에 살던 유년기 얘기부터 시작하시지요.

내 고향은 대전입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줄곧 살았지요. 학창시절에는 잠시 떠나기도 했지만. 해병대를 제대하고 첫 직장 생활까지, 대전에서 청년기까지 살았어요. 유년의 기억이라 해봐야 도시에서만 살아서 낭만적인 추억은 초등학교까지는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다만 5살 때 충남 당진에서 교사로 근무하셨던 할아버지 집에 1년 정도 지냈어요. 지금도 그곳 마을의 아름답고 눈부신 정경이 눈에 선할 정도로 또렷하게 남아있어요. 나이가 들면서 자식들에게 그런 유년기 산골 자연의 추억을 만들어 주지 못한 것들이 마음에 걸릴  정도로 아름다운 추억이었어요. 또 초등학교 5학년 때일 겁니다. 아버님이 남자는 자기 자신을 지킬 정도의 힘이 있어야 한다며 권투를 시켰어요. 그 후로 나이가 들 때까지 운동을 놓지 않았습니다.


따님(탤런트 이청아)도 소질을 이어받아 대를 이어 연기자로 활동 중인데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아버님은 청백리상을 받았을 정도로 청빈한 전형적인 도청의 회계공무원이셨어요. 정년퇴직하신 후에도 오랫동안 학교에서 회계 일을 보셨던 근면하고 평범한 분이셨지요. 하지만 어머니는 무주군의 만석꾼 부잣집 딸로 일제강점기에 타이피스트를 하셨던 신여성이었습니다. 아주 명석한 두뇌와 활달한 성격으로 매사에 긍정적이었어요. 노래와 연기에 재주가 있으셔서 젊은 시절 당시 배우들의 요람이었던 ‘황금좌’에 찾아가 배우를 하겠다는 것을 부모님이 거의 ‘체포’를 하다시피 반강제로 집으로 데려오셨답니다.


그럼 모계의 유전인자를 많이 받으셨군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연기도 재주가 있어야 하고 제 취미와 적성에 맞아야 할 수 있다고 보면 딸도 핏줄을 속일 수 없지요.


초등학생 때 권투를 하셨다고요? 공부와는 거리가 있었겠군요.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매사에 적극적인 어머니의 치맛바람 덕분에 초등학교 시절에 공부 잘하는 우등생 소리를 들었지요. 하지만 중학교 들면서부터 여러 종목의 운동을 하고 선수생활을 하면서 변화가 많았어요. 궤도를 벗어나기도 하고.


궤도를 벗어났다함은 사고뭉치를 의미하는지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선수로 뽑혀 처음엔 배구를 했다가 다시 핸드볼 선수로 전향을 해서 본격적인 학교 대표선수 생활을 하게 되었어요. 공부보다 운동에 치중하게 되자 부모님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지만 운동을 좋아해 내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고집이 통했지요. 부모님에게 잘하지 못하면 운동을 그만두겠다고 각서를 쓰고 난후 운동에 전념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운동이 내 인생의 커다란 변곡점이 될 줄 훗날에야 알게 되었어요. 핸드볼 특기자로 대전의 유성농고에 진학을 했지만 학교 측이 핸드볼운동부를 해체했어요. 주로 운동장에서 보내다가 교실로 돌아가 책상 앞에 앉았지만 중학 때부터 한창 공부할 시기에 기초를 놓쳐버린 나로서는 너무 막막하더군요. 자연히 학교를 배회 방황할 수밖에 없게 되었어요. 그런 와중에 사고가 일어나 학교를 자퇴하고 일반학생으로 전주의 영생고등학교로 전학을 하게 됐어요. 역시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던지 넘치는 젊음을 발산하며 충돌하는 텃세싸움에 휘말려 다시 대전의 충남공고 전기과로 전학을 하게 됩니다. 결국 3개의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겨우 졸업장을 손에 쥐었지요.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연극을 했나요?

연극은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시작을 했어요. 고등학교 졸업 후 1년 이상을 백수로 빈둥거리다가 안되겠다 싶어 해병대에 지원 입대를 했지요.


해병대 출신이군요.

해병대 출신이면 누구나 첫마디가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외칩니다. 하하하. 아직 해병대에서의 향수가 몸에 고스란히 배어있고요. 연극 역시 해병대 친구(기수 선배)의 권유로 시작을 했으니까요.


남자들은 군대 이야기가 나오면 참지를 못하는데...

많은 사연들이 있지만 아직도 잊지 못하는 분은 바로 중대장입니다. 능력은 뛰어나지만 몇 번의 사고로 진급을 못하신 고참 소령이었어요. 나를 너무 예뻐해서 사병은 출입금지인 장교클럽에도 나를 데리고 다닐 정도였으니까요. 한번은 선임하사가 나에게 뭐라고 나무라자 중대장이 재떨이를 던져 쇠로 된 재떨이가 선임하사의 머리에 박히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어요. 와중에 중대장이 전출을 하게 되자 난 고참들이 무서워 그 부대에서는 도저히 견딜 자신이 없어 다른 부대로의 전출을 간청하기도 했지요. 결국 통신병으로 입대를 했다가 전출을 통해 타부대의 수송대에서 제대를 하게 되었어요.


또 기억에 남는 사람이나 사건은 없나요?

아직도 연락이 되는 친구들이나 선, 후배들이 제법 있어요. 특히 동기중 이상철은 아직도 절친하게 지내고 있어요. 지금 소방기기 사업을 하는 그 친구 역시 평생 나를 잊지 못할 겁니다. 그 친구 팔뚝에 내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흔적(문신)을 남겼기 때문에. 하하하.


그럼 언제 연극을 시작했습니까?

제대 후 충남방적 전기과에 입사해 3년 정도 근무를 했지만 미래에 대한 비전이 전혀 보이지 않더군요. 무조건 그만 두고 봤어요. 잠시 소일을 하면서 장래를 구상하다가 권투도장엘 나갔어요. 그러나 다친 축농증이 심해져 삼촌의 친구 되는 의사를 소개받아 서울로 갔었지요.  수술 후 통원치료를 하면서 잠시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해병대 친구로 연극 연출을 하던 이길재 만나면서 내 인생이 길이 전혀 예기치 않은 곳으로 급회전을 하게 됩니다. 고인이 됐지만 그 친구는 연극 <바쁘다 바뻐>의 극작, 연출가로 유명했어요.


아하, 이길재 연출가가 발굴한 배우였군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요. 1979년이었어요. 기억은 잘 나지 않습니다만, 그와 공간사랑이라는 소극장에서 연극 한 편을 관람했어요. 보고난 후 “어때?”하고 물었어요. 연극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지만 큰소리로 “저 정도 연기면 나도 하겠다.”고 대답했어요. 아마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잠재적인 예술적 재능과 자신감이 순간적으로 가슴을 타고 밖으로 터져 나왔던 거 같아요. 그 한마디를 하고 그 길로 이길재 씨를 따라 연극판에 발을 디뎌, 바로 3.1로 창고극장에서 이길재 연출의 <따스한 손길이 내 손에 닿을 때>에 출연을 한 것이 데뷔작으로 남아있습니다.


데뷔 무렵의 연극계 이야기 좀 하시지요.

내가 어느 날 배우가 됐으니 그 후 정신이 없었어요. 첫 공연이 끝나자 이길재 씨가 극단 ‘산하’에서 대공연을 준비하는데 같이 하자더군요. 세종문화회관별관에서 했던 <모모>란 작품이었는데 당시 인기 절정의 탤런트였던 이덕화 씨와 경인선 씨가 각각 남녀 주인공을 맡았어요. 지금은 쟁쟁한 배우인 정운봉, 이길재, 나 등이 회색인간, 엑스트라로 출연을 했지요. 공연이 끝나자 7만원이란 당시로선 거금의 개런티를 받아 연극도 잘만하면 굶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충남방적 근무 할 때 수습사원으로 월급을 17,000원 받았거든요. 바로 정운봉 씨의 극단 ‘맥토’에 정식 단원으로 들어가 극단 소속으로 공연을 하며 바쁜 생활을 이어갔어요.


30여 년 연극무대만을 고집한 데는 남다른 이유라도 있는지요?

물론 영화나 방송을 외면하지는 않았어요. 배우는 어느 무대든 서야 한다는 게 지론이었어요. 특히 어린이 연극에는 훌륭한 배우들이 많이 출연을 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린이 연극이 연극예술의 미래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업성에 치여 제대로 된 배우들이 출연을 기피하는 현상이 안타깝습니다. 가끔 방송이나 영화에서 출연 제의가 들어왔지만 꼭 연극 연습에 들어간 후에 제의가 들어와 출연을 고사할 수 없었을 뿐이지요.


그럼 출연 영화가 한편도 없습니까?

영화는 단역 정도라 내세울 작품이 적지만 TV드라마는 <신입사원> <스포트라이트>, 특히 <머나먼 쏭바강>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해병대 시절 월남전에 지원을 하고 싶어도 병과가 없어 참전을 못했는데 배우로서 월남 땅을 밟으니 느낌이 남다르더라고요. 호치민 공항에 내렸을 때 주연급이었던 오대규가 ‘말라리아’ 약을 권하며 꼭 드시라던 기억이 눈에 선하고 첫날 밤 호텔에 들었는데 냉장고가 국산 제품인 ‘금성’이더군요. 냉장고를 보면서, '월남전에 참전했던 우리 선배들이 몇이나 이 방에서 밤을 보냈을까? 그들이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갔을까?'하는 온갖 상념들이 꼬리를 물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대학로를 버리고 경기도립극단으로 오게 된 특별한 연유라도 있었나요?

개인적으로 고민을 많이 했지만 가장 우선적으로 안정적인 생활 속에서 공연에 올인 해보자는 욕심이 컸어요. 물론 수입면에서 보면 대학로 시절에 비해 반이 채 안되지만 대학로라는 곳이 배우들에게는 피를 말리는 동네 아닙니까? 공연 중에도 다음 공연은 언제 누가 불러줄까 하는 마음 졸임에 항상 쫓기듯 생활 할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도립극단은 그런 심리적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좀 더 나 자신의 연기를 돌아보고 매진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고 결정을 했었지요.

도립극단의 활동이 서울에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대학로 극단들과 비교해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납니까?
공공예술의 장점은 상업성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점이지요. 경기도립에서 하는 모세혈관 공연은 공공예술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처음에는 소란스런 장터에서 아무도 시선을 주지 않는 공연을 예술이란 이름으로 하기에 너무 쑥스러웠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비록 몇몇의 관객만 있어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공공예술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또 경로당이나 노인정에서의 공연은 배우로서 그 가치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희열을 가져다줍니다. 국립극단이나 서울의 공공예술단에서 추구하는 상업적 변모는 공공예술단의 존재이유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키는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경기도립극단이 관객에게 매달리지 않고 연극의 순수성과 예술성을 지켜가기 위한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요즘 예술성 보다 상업성에 치중하고 있는 국립극단을 비롯한 서울 지역 공공예술단의 무대와는 매우 대조적입니다.

연극의 예술적인 가치를 존중하는 연극인의 한사람으로 안타까운 모습이지요. 경기도립은 그래도 공공예술단으로 뚜렷하게 자기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외국의 유명 연출가를 초청, 도민들을 위해 수준 높은 공연제작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고 또 산간벽지의 문화소외층을 위한 순회공연, 모세혈관운동, 시골의 장터를 돌며 척박한 계층을 위한 공연 등 공공예술단 으로서의 진면목을 보이고 있습니다.


많은 예술인들이 진정한 진가를 발휘하려면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배우는 50이 넘어야 좋은 연기가 가능하고, 연출은 60이 넘어야 어느 정도 예술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50살이 넘으면 공공예술단에서 은퇴를 해야 하는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 자신이 처해있는 문제라 답하기 곤란하지만 개인적 생각은 더 많은 노련한 배우들이 공공예술단에서 연령의 한계를 뛰어 넘는 활동을 하여 그들의 진가를 관객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진 연기자로 후배 배우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어떤 말부터 하실 건가요?

연기의 기본은 대사겠지요. 대사가 되지 않는 배우는 배우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기본기에 충실한 배우가 되라고 강조하고 싶네요. 또 연극은 물론 연기는 정직해야 합니다. 배역 인물은 허구지만 주어진 연기는 인물의 진실에 접근하는 노력이 따라야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든 거짓이 나타나면 예술로 내세울 수 없으니까요. 아직까지 포장을 해서 거짓 연기는 해 보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삶을 살면서 잃어버렸거나 간과했던 진실들을 연기를 하면서 찾은 경우도 있으니까요.


연극예술에 대한 개인적 소견이 있다면 어떻습니까?

진실입니다. 어릴 때 누드화를 보면서 예술가들이, 특히 로댕 같은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왜 굳이 누드화를 선호했는지 궁금했는데 지금에야 그들의 인간 본질에 대한 접근, 진실에 대한 집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순에 이르러 우여곡절과 희로애락의 세월을 돌이켜 볼 때  가장 가슴 아픈 기억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어머니의 운명이겠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주위의 분들에게 핸드폰으로 부고를 알렸어요. “이승철의 어머니가 아주 먼 여행을 떠나셨다고...,” 문자를 보내면서 남 몰래 많이 울었습니다. 뼈 속까지 전해지는 회한과 슬픔을 누를 길이 없었어요. 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지요. 경제적 고통은 있었지만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았구나 하는 삶에 대한 반추를 말입니다.


연극인으로 느낀 인생 최고의 희열이라면 어떤 것이 있는지요?

경기도립극단에서 하는 <모세혈관>이라는 공연이 있어요. 아까도 잠시 언급했지만 양로원이나 노인정, 시장터를 돌면서 하는 공연인데 희열을 느낍니다. 평생 공연장, 연극을 몰랐던 분들이 우리의 공연을 보고 같이 웃고 웃을 땐 무대 배우로 느끼지 못했던 감회가, 진정한 배우로서의 보람을 절감합니다.

 

인생의 선배로서 연극이 아닌 다른 부분에 대한 감정이 있다면?

꼭 연극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사소한 것입니다만, 집 사람이 건강이 좋지 않아 내가 식사나 집안 청소 등을 하면서 하루 세끼의 식사 준비를 위해 여자들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간단하게 보였던 집안 청소나 빨래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비로써 느낍니다. 우리가 모르고 지나쳤던 부분들이 새삼스레 와 닿습니다.


따님 이청아가 드라마의 주역 인물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분은 어떤 것인가요?

항상 청아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건 "연기를 잘해라"가 아니라 "형제간의 우애를 지켜라, 결코 부끄러운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얘길 합니다. 나 역시 가족들, 특히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아빠와 연기자가 되기 위해 한시도 소홀해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청아가 연기생활을 하다 보니 더 신경이 쓰이지만 가능하면 간섭 않고 모른 척 하려고 노력합니다. 아직까지 청아의 연기에 대해 일언반구 조언도 해 본적이 없으니까요. 자신의 노력 여하에 결과가 나오지 연기라는 것이 결코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믿습니다. 청아가 워낙 영리하고 집념이 강하기 때문에 아빠의 후광 없이도 충분히 대성할 배우라 믿어요.



30년 이상 연극무대에 오른 배우의 남은 꿈은 무엇인가요?

가족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기들 삶을 꾸린다면 아버지로 더 바랄 게 있겠습니까?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집사람이 빨리 건강을 찾아 여행을 같이 다녔으면 좋겠고 또 나이 먹어서도 남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막걸리 값은 낼 수 있는 노년이었으면 좋겠어요.


이번 경기도립극단 창단 20주년 기념으로 준비한 안톤 체홉 150주년 기념 <닥터 체홉의 사랑은>은 어떤 작품인가요?

제목 그대로입니다. 체홉의 <곰>, <청혼>, <기념일>이라는 세 작품을 옴니버스식으로 각색한 작품입니다. 러시아의 공훈연출가 알렉산드르 꾸진이 연출을 맡아 체홉의 진수를 보여준 공연으로 경기도문화의전당이 송년문화모임을 정착시키고자 시도한 송년가족문화프로그램입니다. 저는 <기념일>에서 쉬뿌친 역을 맡아 매우 우람한(?) 여배우를 안아 돌리기도 하는 엄청난 연기를 해냈습니다.


이번 공연은 결과와 반응에 비해 세계적 연출가 초청 비용 등 제작비가 많이 들고 공연 날짜(5일, 7회 공연)가 너무 짧았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물론 대학로나 일반 극단의 시선에서 볼 때 비판의 소리가 나올 수 있어요. 극단의 지도위원으로 안타까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경기도문화의전당이 우리 극단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모든 단체와 송년프로그램 속의 한 부분으로 추진됐습니다. 종합적으로는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많은 공연으로 봅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이제 연기에 대해 뭔가 나름대로 소신 있게 말할 수 있다는 제 자신이 대견스럽습니다. 후배들에게, 동료들에게 더 노력해서 훌륭한 공연, 좋은 무대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연극동료들, 또 인터뷰 365 모든 독자들에게 지면을 통해 새해 인사를 드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건강하고 행복 충만한 2011년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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