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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8/01/16 00:00:00  소혁조




피아노의 알파와 오메가, 리히터
<소혁조의 인터미션> 건반을 축복한 화려한 손가락


 


[인터뷰365 소혁조]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클래식 피아노를 즐겨 듣는 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고 결코 모를 수도 없는 이름이다. 음악을 듣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행위이기에 보편, 객관적인 정답은 있을 수 없겠지만 20세기를 살았던 피아니스트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아마도 수많은 클래식 애호가들은 리히터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만큼 그는 너무도 큰 족적을 남기고 떠난 20세기 피아니스트의 거장이었고 그가 남긴 수많은 연주와 음반들은 그 방대한 양과 더불어 완성도에 있어서 리히터 이후의 그 어느 누구도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을 정도이다. 그만큼 리히터는 단연 부동의 톱 위치에 놓인 피아니스트로 평가하는데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유년시절의 리히터



리히터의 인생은 어릴적부터 꽤 파란만장했고 드라마틱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순탄함보다는 가시밭길처럼 울퉁불퉁한 길이 많았고 뛰어난 재능에 비해 데뷔와 출세도 늦은 편이었다. 리히터의 인생사는 그의 회고를 기록한 인터뷰를 토대로 해서 만든 DVD도 있고 책도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바란다.



리히터는 1915년 우크라이나 태생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러시아였으나 그의 아버지는 독일인이고 그 역시 우크라이나 태생이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서 군생활을 하였고 훗날 피아노와 작곡을 배우기 위해 빈으로 이주하여 그 곳에서 피아노를 배우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피아노에 재능이 있던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는데 리히터는 그의 아버지가 대단한 피아니스트였다고 회고한다. 아버지에게서 피아노의 기본기를 배울 수 있었고 훗날 어린이를 위한 피아노 학교에 입학하였지만 곧 탈퇴하였다. 그리고 이후 쭉 독학으로 피아노를 공부하였다. 바로 이런 특성 때문에 그는 그토록 방대한 레퍼토리의 곡을 다루면서도 어느 하나의 스타일에 구속되지 않고 대단히 유연하게 변신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리히터는 음악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어떤 곡도 초견으로 연주를 할 수 있었고 15세의 나이에 극도의 테크닉을 요구하는 난곡들도 수월하게 연주할 수 있을 정도였다.


리히터가 처음으로 연주다운 연주를 시작할 수 있었던 계기는 15세 때 오데사 오페라 극장의 반주를 맡으면서부터였다. 리히터는 당시를 회고하길 처음으로 돈을 벌면서 연주를 하였고 오데사를 벗어난 먼 곳에까지 불려 다니며 가수들의 반주를 맡아서 했다고 한다. 당시 받았던 돈은 겨우 감자 한 포대를 살 수 있을 정도의 적은 돈이었고 매우 힘들었지만 이런 유년 시절의 활동들이 훗날 그가 갖게 될 음악의 영감에 튼튼한 토대가 되었음을 분명하다.



뒤늦게 이루어진 화려한 데뷔. 그러나…



22세 때 그는 모스크바로 가게 되었다. 러시아 피아니즘의 대명사격인 하인리히 네이가우스의 문하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네이가우스 역시 리히터의 뛰어난 재능에 감탄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는 정도였다고 한다. 네이가우스는 심지어 ‘그가 나의 제자인 것이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고 내가 그의 스승인 것이 자랑스럽다’라는 극찬까지 할 정도였으니 그가 네이가우스의 눈에 얼마나 대단하게 보였는지 알 수 있다. 훗날 네이가우스의 소개로 리히터는 프로코피예프를 알게 되었고 프로코피예프 6번을 초연하며 화려한 데뷔를 하게 된다.



리히터는 그 자신이 갖고 있던 뛰어난 재능에 비해 피아니스트로서의 데뷔가 늦은 편이었다. 27세의 늦은 나이에 데뷔할 수 있었는데 데뷔 무대는 모스크바 음악원 대강당이었고 데뷔 곡은 앞서 언급한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6번이었다. 작곡가 프로코피예프는 리히터가 연주한 그의 피아노 소나타를 듣고 자신의 곡이 이토록 아름다운줄 몰랐다며 감탄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의 데뷔 무대는 청중들의 열광적인 환호 속에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때때부터 리히터의 명성은 러시아 전체를 향해 뻗어나가게 된다.



뒤늦은 데뷔를 하여 이제 겨우 그의 명성을 알릴 시기에 즈음하여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리히터는 고향을 떠나 모스크바에 유학을 왔었고 그의 가족들은 모두 고향인 오데사에 있었다. 리히터의 아버지는 오데사 주재 독일 영사관에서 피아노 개인교습을 했다는 혐의로 소련군에게 잡혀가 모진 고문 끝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와 삼촌의 행방은 묘연했다. 하지만 고향을 떠나 유학을 가있는 리히터는 이 사실을 알 수 없었고 그는 무척 괴로워했다고 전해진다. 바로 이런 괴로운 시기에 그를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한 대의 피아노뿐. 그는 당시 오로지 피아노만을 연주하며 온갖 잡념을 지배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리히터의 명성은 점점 더 커져갔다. 하지만 1950년대 중반을 넘은 시점까지도 그의 명성은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에서만 알려졌을 뿐이었지 서방세계에서는 그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소문으로만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있다는 것을 들어서 알뿐이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글랜 굴드가 1957년에 처음 소련에 와서 연주를 할 때 리히터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는 리히터를 두고 이르기를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연주자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1958년에 제1회 차이코프스키 콩쿨에 참가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갔던 반 클라이번 역시 리히터의 실력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리히터와 평생지기였고 항상 그와 비교되었던 에밀 길렐스는 1950년대 중반의 이른 시기부터 서방세계에 진출하여 서방세계의 음악 애호가들을 경악하게 하였다. 당시 수많은 기자들과 애호가들이 와서 그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을 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철의 장막 저쪽엔 나보다 훨씬 훌륭한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라는 피아니스트가 있다. 나보다는 그를 기다려라"



서방세계 사람들은 길렐스의 무시무시한 힘의 연주에 이미 한 번 넉다운이 되었는데 그 길렐스가 이런 이야길 할 정도이면 과연 소련에는 얼마나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많이 있는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소련엔 도대체 얼마나 훌륭한 예술가들이 있는지 경외심을 보였을 것이다.


이처럼 리히터의 서방세계 데뷔가 늦어진 것엔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그는 정통 러시아 피아니즘을 승계한 피아니스트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어린 시절에 독학으로 피아노를 마스터했고 그의 연주는 사회주의 체제 예술의 특징인 강렬한 표현과 직선적인 메시지 전달이란 점에서 한 발짝 비켜난 것이었다. 이에 반해 길렐스는 어린 시절부터 철저히 사회주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고 그의 피아노는 대단히 강렬하고 직선적이었다.



둘째, 그의 출신 성분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의 아버지는 독일인이었고 전쟁 중에 소련군에 끌려가 고문 끝에 옥사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훗날 리히터에게도 소련의 비밀경찰이 미행을 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게다가 그의 어머니를 비롯한 다른 가족의 행방도 묘연한 상태에서 이처럼 출신이 불분명한 리히터를 서방세계에 급히 내놓을 필요까진 없었을 것이다.



철의 장막을 넘어. 뜨거운 눈물의 재회



1950년대 후반부터 동구권의 사회주의 국가부터 연주여행을 시작하며 그 명성을 날리던 리히터는 1960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게 되었다. 카네기 홀에서 열린 그의 공연은 그야말로 열광, 경악의 사전적 의미를 훨씬 뛰어넘는 무시무시한 마력이 있었다고 한다.



리히터는 이 공연 당시 그의 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전쟁의 난리 속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그의 어머니는 독일군이 소련에서 패퇴하는 무리에 함께 섞여 독일로 흘러 들어갔고 이후 서독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리히터의 존재를 알게 된 어머니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온갖 힘을 다썼고 결국 미국에 첫 공연을 하게 된 후 리히터와 어머니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극적인 상봉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 공연실황 음반을 듣고 있으며 청중들의 수많은 박수소리와 환호성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이 정도의 압도적인 공연을 처음 경험하는 미국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그저 입을 떡 벌리고 멍한 눈과 귀로 리히터의 마법에 빠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뛰어난 실력을 갖춘 피아니스트이지만 기껏 소련의 촌구석 출신 정도로 알음알음 소문만 무성했던 리히터는 이 공연 이후에 전 세계적인 거물이 되었다.



1960년에 미국에서 성공적인 데뷔를 하게 된 리히터는 1961년에 런던을 시작으로 서유럽 쪽을 여행하며 공연하였다. 그의 연주여행은 가는 곳마다 화제를 일으키며 성공을 거듭하였다. 당시의 유명한 동영상들이 지금껏 전해지고 있는데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의 반주를 맡은 베토벤 첼로 소나타 등의 동영상이 남아 있다.



괴팍하고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



리히터는 대단히 치밀하고 빈틈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절대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아 반드시 하루에 3시간 이상을 연습하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던 연습벌레였다.



리히터가 상당히 까다롭고 괴팍한 성격을 가졌다는 일화가 몇 가지가 있다. 우선 그는 무언가에 얽매이는 것을 선천적으로 싫어한 듯 하다. 일례로 제1회 차이코프스키 콩쿨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적이 있었는데 결선에서 미국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에게 10점 만점에 100점을 주고 다른 피아니스트에겐 0점을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 이후로 리히터는 단 한 번도 콩쿨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지 않았다.



리히터는 20세기를 살았던 피아니스트 중 가장 많은 레퍼토리를 다루며 레코딩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데 그가 남겼던 음반들의 특징이 있다. 그는 수많은 작곡가들의 수많은 곡을 발굴하여 연주, 녹음하였지만 정작 한 음반사와 시리즈로 전곡을 녹음(예를 들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 프로젝트)한 적이 드물었다.



연주회장에서의 그의 모습도 대단히 독특했다. 우선 그는 암보를 싫어했다. 암보를 하느니 한 번 더 연습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의 연주 동영상을 보면 항상 옆에서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피아니스트에게 환한 조명을 비추는 것을 싫어했다. 연주회는 피아니스트의 화려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연주를 듣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연주를 동영상으로 보면 항상 보면대 위에서 어둡게 빛나는 작은 스탠드 하나만이 존재할 뿐이다.


너무도 완벽한 성격 때문에 연주회를 시도 때도 없이 취소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사생활이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서 그는 항상 신비주의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터뷰도 잘 응하지 않았고 좋고 싫음이 너무 분명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어린 시절에 겪어야 했던 상상하기도 힘든 큰 고통이 그의 성격을 괴팍하고 방어적으로 만들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리히터는 그와 친한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길렐스와의 관계로도 유명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무척 존경했고 리히터는 길렐스가 너무 훌륭하게 연주한 곡이라면 평생동안 연주하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도 2번만 녹음했고 3번은 녹음하지 않았고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도 가장 중요한 5번 황제는 녹음하지 않았다. 길렐스의 연주가 너무 완벽해서 자신이 달리 손을 댈 필요도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프로코피예프 3번도 그랬다. 리히터는 그 곡을 무척 좋아했는데 길렐스의 연주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기 때문에 자신은 평생동안 그 곡을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1994년엔 한국에도 방문했었다. 당시 그는 은퇴를 앞두고 그의 생애 마지막 연주여행을 다니고 있던 참이었는데 국내의 음악애호가들 사이에선 살아있는 20세기 피아니스트의 전설이 온다는 소식에 무척 흥분했었다. 1995년. 그의 나이 80이 되어 귀가 들리지 않아 더 이상 연주를 할 수 없게 되자 공식적으로 은퇴하였고 1997년 82세의 나이에 빛나는 생을 마치고 모스크바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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