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l  로그인  l  회원가입  l  아이디/비밀번호찾기  l  즐겨찾기  l  시작페이지  l  2019.6.26 (수)
 http://interview365.mk.co.kr/news/58548
발행일: 2013/05/21 11:54:47  석광인




가요계의 돈키호테 가수 오기택
“방송사의 고의적인 중상 때문에 가수활동에 환멸을 느꼈다”


 

【인터뷰365 석광인】지난 1960년대 ‘고향무정’ ‘충청도 아줌마’ ‘아빠의 청춘’ 등을 노래해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매혹의 저음가수 오기택(74)이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져 그를 좋아하던 올드 팬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고 있다.
오기택은 지난 1962년 데뷔곡 ‘영등포의 밤’(김부해 작사 작곡)을 히트시키며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이후 타고난 가창력과 매혹적인 음색으로 부르는 곡마다 폭발적인 히트를 기록하는 등 당대 최고의 가수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골프 등 스포츠를 유달리 좋아하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의협심을 발휘하는 등 호탕한 성격 탓에 방송가와 오랫동안 갈등을 빚는 등 ‘가요계의 이단아’ 또는 ‘가요계의 돈키호테’로 불리기도 했다.
오기택은 한때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평생 결혼도 않고 독신으로 살며 가수 활동에 전념하지 않은 탓에 무려 17년에 걸친 투병 생활로 벌어놓은 돈을 모두 치료비로 탕진했다.
그는 지난 1997년 정초 추자도 인근 무인도 염섬에서 홀로 낚시를 하다가 왼쪽 다리와 팔이 마비되는 뇌출혈로 쓰러져 사경을 헤매다 48시간 만에 극적으로 구조된 전력이 있다. 제주도를 거쳐 서울로 후송돼 뇌수술을 받는 등 목숨을 건졌으나 당시 마비됐던 왼쪽 다리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10여 년 간 목발을 짚고 다니며 무대에도 오르는 등 재활에 매달렸으나 5년 전 갑자기 증세가 악화돼 홀로 일어서서 걷지 못하게 되고 급기야는 휠체어에 의지한 채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외출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거기에 몸 전체가 약해져 가수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노래까지 제대로 부를 수 없으니 수입이 끊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가수 활동에 전념하지 못한 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대목이라고 밝혔다. 스포츠를 너무 좋아하다 보니 방송 출연을 등한시했고 급기야는 방송사와 갈등을 빚는 바람에 자신의 노래가 방송가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것. 그런데도 방송사들과 타협할 생각은 않고 여전히 스포츠만 즐기는 바람에 가수로는 실패한 인생이라는 설명이다. 10여 년 전만 해도 양주를 들고 기자를 찾아와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던 그를 서울 여의도 진주아파트 자택을 찾아 만났다.

 

경제적으로 무척 어렵다고 들었다. 도움 받을만한 형제 자매도 없나?
이복형제들이 있지만 어린 시절 돌아가신 아버님에 대한 반발심 때문에 내왕이 없었고 이젠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 천호동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막내 이모의 딸인 사촌 여동생이 가끔 드나들며 도움을 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하다못해 기초노령연금이라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아, 그건 내가 이 아파트를 갖고 있어서 받을 수 없다고 한다. 15평에 시가가 4억5천만 원이라는 데 연금 수령 조건이 되질 않는 모양이다. 하여간 정부에서 받는 돈은 한 푼도 없다. 그래도 건강보험공단에서 파견해준 요양보호사 권남희 선생이 계시니 정부의 도움을 받기는 한다.

 

후배가수 박상철씨가 매달 20만원을 송금


그럼 생활비랑 약값 등 치료비는 어떻게 하나? 작사가와 가수로 활동했으니 저작권료 수입이 있을 법한데….
젊은 시절 ‘사나이 길’, ‘나의 길을 가련다’ 등 내가 직접 작사하고 신일동 선생이 작곡해 취입한 곡들이 몇 개 있는데 크게 인기를 누린 것이 아니어서 저작권료는 몇 백 원도 되질 않는다. 실연자연합회에서 가수의 저작인접권료를 3개월에 한 번씩 받는데 10만원 정도밖에 되질 않는다. 다행이 많은 동료 후배가수들이 도와줘 겨우 버티고 있다. 후배 가수 박상철씨가 2년 전부터 매달 20만원씩 내 통장으로 입금해줘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 외에 김상희씨, 최백호씨, 태진아씨 등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다. 정말 고마우면서도 송구스런 일이다.

 

이 아파트를 담보로 역모기지론 즉 주택연금을 신청하면 매달 2백만 원 정도는 받을 수 있는데…. 
얘기는 들었는데 아직 신청해보질 않았다. 치료비로 쓴 빚을 갚느라 아파트를 담보로 은행에서 3천만 원의 대출을 받기는 했다. 그 외에 다른 빚은 없다. 물론 후배 가수들에게 진 신세도 빚이라면 빚이다. 그 주택연금이란 건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내가 세상을 뜨면 남은 재산을 오기택 가요제를 열고 있는 해남예총에 기증할 생각이었다.


오 선생을 잘 모르는 요즘 팬들을 위해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해달라.
난 1939년 4월 2일 전남 해남군 북일면 월성리에서 태어났다. 호적상으론 1943년생이지만 실제 태어난 건 1939년이다. 아버님은 세 살 때 돌아가셨다고 한다. 북일초등학교와 해남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살던 외삼촌의 도움으로 상경해 서울 성동기계공업고등학교 기계과를 졸업했다.

 

가수로 데뷔한 계기는?
오기택은 전국체육대회에 전남대표로 참가해 금 은 동메달을 모두 수상할 정도로 골프에도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사진은 오기택이 전국체전에서 수상한 메달들.
고교 졸업 후 회현동 동화백화점(현재의 신세계백화점)에 있던 동화예술학원에 다니며 노래를 배웠다. 고 고복수 선생이 운영하던 학원이었는데 1961년 동화백화점 대표로 KBS TV가 주최한 제1회 직장인 콩쿠르에 나가 1등을 했으니 노래는 제법 하는 편이었다. 당시 TV로 내가 노래하는 모습을 본 작곡가 김부해 선생이 보름간 나를 찾으셨다고 한다. 당시 충무로에 있던 가요작가동지회 사무실을 찾아가 보니 김부해 선생은 물론 반야월 선생, 조춘형 선생, 박시춘 선생 등 당시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작곡가들은 모두 계셔서 놀라고 말았다. 김부해 선생이 나를 보더니 “노래 한 번 불러봐라”고 말씀하셔서 그 분의 피아노 반주에 ‘울고 넘는 박달재’를 불렀다. 그 분은 노래를 잘한다며 내일 다시 오라는 것이었다. 오디션에 합격한 것이다.
다음날 다시 찾아뵈었더니 신곡 악보들을 내미셨다. ‘영등포의 밤’, ‘가버린 영아’, ‘키스 키스 키스’ 등 모두 김부해 선생이 직접 작곡한 곡들이었다. 몇 달 동안 연습을 하고 김부해 선생의 주선으로 신세기레코드사와 전속계약을 맺었다. 당시 초봉이 월 5천원이었는데 엄청 큰 돈이었다. 1962년 12월 ‘영등포의 밤’이 담긴 데뷔 음반이 나왔다. ‘영등포의 밤’은 나오자마자 히트를 쳐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던 이미자씨의 ‘동백아가씨’의 기세를 꺾을 정도로 반응이 압도적이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당시 신세기레코드사는 부도로 망하기 직전이었는데 ‘영등포의 밤’이 담긴 레코드가 밤새 찍어도 모자랄 정도로 잘 팔려 회사가 되살아났다고 한다.
‘영등포의 밤’은 나중에 엄앵란씨와 남궁원씨가 주연한 영화로도 만들어질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으나 창법이 왜색이라는 이유로 이미자씨의 ‘동백아가씨’와 함께 금지곡으로 묶였다가 다시 해금되기도 했다. 3년 전에는 영등포구가 영등포 타임스퀘어에 ‘영등포의 밤’ 시비를 건립했으니 가수로선 정말 영광스런 일이다.

 

‘영등포의 밤’으로 스타덤에 올랐을 때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이듬해인 1963년 4월 입대했다. 진해에서 훈련을 받고 서울 한남동 군예대에서 근무했다. 65년 가을 만기 제대할 때까지 전국을 돌며 군부대 위문공연과 새마을 위문공연에 참가하고 다녔으니 가수활동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파월 병사 위문공연에도 두 번이나 참가했다.

 

해병대를 제대한 다음 해인 1966년 ‘고향무정’이 대히트를 기록했다.
그렇다. 함께 취입한 ‘충청도 아줌마’와 함께 작곡가 서영은 선생의 곡이었다. ‘고향무정’의 반응은 ‘영등포의 밤’의 그것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라디오를 틀었다 하면 ‘고향무정’이 나왔고 전파사와 레코드가게 등 서울 시내 가는 곳마다 그 노래가 나왔다.


전성기 때 방송에서 노름꾼으로 몰려 가수활동 중단

 

‘고향무정’이 히트할 때 방송사들과 트러블이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이 무렵 볼링에 미쳐 있었다. 몇몇 친구들과 어울려 영화배우 신영균씨가 운영하던 명동 신스볼링장에 출근하다시피 하느라 ‘고향무정’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 중이었는데도 방송 출연을 등한시 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볼링을 하러 워커힐호텔에도 자주 다녔다. 하루는 MBC 라디오 ‘정오의 노래’라는 프로그램에서 ‘고향무정’을 튼 다음 “이 노래를 부른 가수 오기택이 노름에 미쳐 워커힐 카지노에서 산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바람에 난리가 났다. 나는 즉시 MBC 담당 PD 정모씨에게 달려가 멱살잡이를 하며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말았다.
이후 MBC는 물론이고 서울의 모든 방송국들이 오기택의 노래는 전혀 틀지 않았다. 젊은 가수가 겁도 없이 나이 든 방송PD에게 폭력을 휘둘렀으니 괘씸스럽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미운 가수라 할지라도 멀쩡한 사람을 노름꾼으로 몬 것은 정상이 아니었다. 난 그 때부터 가수활동을 중단했다. 방송국이 왜 그랬을까 하고 곰곰 생각해보니 가수들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송국에 아부하는 것도 모자라 돈까지 바치고 있으니 방송국 사람들이 가수들을 깔보고 거짓말 방송까지 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그것도 모자라 담합까지 해가며 그 가수의 노래를 방송하지 않았다.

 

KBS 덕택에 가수가 되었는데 가수활동을 그만둔 건 MBC 덕택이 된 셈이다. 가수 혼자서 방송국과 전쟁을 벌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말리며 화해를 권하는 사람도 없었나?
뭐, 그런 셈이다. KBS가 주최한 직장인 콩쿠르에 나가 1등을 하며 가수로 데뷔했고, KBS 라디오의 전국노래자랑이란 프로그램에 계속 출연하며 스타덤에 오른 셈이다. 당시 담당 PD였던 송영수씨에게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반면에 MBC는 처음부터 나를 밉게 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도 MBC에선 내 노래를 틀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에 서영은 선생이 그러지 말라며 굉장히 말리시며 화해를 시도하셨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오랜 투병으로 건강이 악화된 오기택은 선배가수 손인호 선생처럼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방송에 나가 노래를 부르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방송활동을 중단했다는데 이후 ‘충청도 아줌마’, ‘마도로스 박’, ‘아빠의 청춘’ 등 히트곡은 계속 나왔는데 어찌된 일인가?
서울에서만 방송활동을 중단했을 뿐 지방 방송국들은 계속 내 노래들을 틀었다. 그리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지방공연까지 그만둘 수는 없었다. 지방공연에 갈 때마다 현지의 방송에 출연하곤 했다. ‘마도로스 박’과 ‘아빠의 청춘’은 영화 주제가였기 때문에 방송 활동을  않고도 인기를 누린 곡들이다.

 

영화주제가 말고도 많이 취입을 했다.
방송 출연을 중단했을 뿐 취입은 계속했다. 한 달에 무려 20곡씩 몇 년 동안 계속 취입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악단과 가수가 동시 녹음을 했으니 40여 명 중 한 사람이라도 틀리면 녹음을 중단하고 처음부터 다시 하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런데도 내 취입곡이 1천곡을 넘는다. 나중에는 길을 가다가 낯선 노래가 나오는데 목소리가 익숙해 자세히 들어보면 내가 부른 노래인 경우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가수활동에 환멸을 느꼈다면서도 가수분과위원장을 지냈는데…
79년인가 최희준씨 다음으로 맡게 되었는데 가수들의 방송출연료는 확실하게 올려놓았다. 그 때까지 가수들의 등급이 6등급이었는데 경력에 따라 ABC의 3등급으로 줄이고 특A 등급을 신설했다. 출연료 인상률이 무려 150%였다. 목표를 관철시키려 가수들의 방송 출연을 중단시키는 등 고집을 부리며 싸워 성공을 거두었다. 내가 하도 빡세게 나오니 KBS TBC MBC 방송 3사는 이듬해 출연료 조정위원회를 만들기도 했다. 당시 MBC 임택근 아나운서가 조정위원장을 맡아 먼저 50% 인상안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 때 방송사들 특히 MBC의 미움을 많이 받았다. 이후 MBC에선 아예 금지가수가 되고 말았다. MBC와는 정말 인연이 닿지 않았다.

 

가수 이력서와 골프 이력서 두 종류를 갖고 있다…
1980년 처음 입문한 이후 골프의 매력에 빠져 숱한 대회에 나가 입상을 했다. 심지어는 69회부터 71회까지 전국체전에 전남 대표로 계속 나가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 등 메달을 4개나 받기도 했다. 골프를 잘하니 프로 골퍼로 데뷔하라는 권유도 수없이 받기도 했다.

 

인생에서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결혼 못한 게 제일 후회스럽다. 살다보니 사람의 도리가 아니더라. 애도 길러 보고, 속도 상하면서 가정을 이끄는 게 행복인데 사람으로서 도리를 못하면서 헛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친 다음에야 깨달았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두 번째로는 어머니에게 불효한 일이 후회된다. 최희준씨가 가수분과위원장 하실 때 돌아가셨는데 나는 대전에서 공연 중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구로동 집으로 달려왔다. 어머니는 아직 괜찮으신 것 같아 안심을 하다가 깜빡 잠들고 말았다. 잠에서 깨니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최희준씨 패티김씨 이미자씨 등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을 끝내고 화장으로 모셨다. 어머니는 유방암을 앓으면서도 집 근처에 있던 용화사라는 작은 절에 열심히 다니셨다. 돌아가시는 마지막 순간에도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을 읊으셨다고 한다. 화장 후 스님이 하자는 대로 원효대교 아래 한강에 어머니의 뼛가루를 뿌렸는데 어머니가 매일 밤 꿈에 나타나 나를 원망하시는 거였다. 하도 이상해 용화사 스님에게 물었더니 어머니가 “화장해서 뼛가루를 산에 뿌려달라”고 유언을 남기셨는데 스님이 이 말을 전하지 않는 바람에 내가 청개구리가 되고 말았다. 스님에게 어머니의 유언이 없었느냐고 묻기만 했어도 그런 실수를 하진 않았을 텐데 정말 후회스런 일이다. 나도 죽으면 어머니처럼 원효대교 한강으로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겨놓았다. 죽어서라도 어머니 곁으로 가고 싶어서다.
세 번째 후회되는 일은 가수 활동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은 사실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을 위해 스포츠를 즐기는 건 좋았는데 생업인 가수활동을 접어둔 일은 정말 후회스럽다.

 


 

보도자료 및 기사제보 kayeye2@naver.com


- Copyrights ⓒ 인터뷰365,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interview365.com 발행인 김두호 ㅣ 편집인 겸 청소년보호책임 김두호
인터넷 신문 등록 서울아00737ㅣ등록일 2009. 1. 8 / 창간일 2007. 2. 20
발행소 서울시 구로구 신도림로19길 124 콜카빌 801호 l TEL: 02-6082-2221 ㅣ FAX: 02-2272-2130
(재)신영균예술문화재단 Allrights reserved press@interview365.com ㅣ shinyoungky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