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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8/01/29 00:00:00  소혁조




강철의 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
<소혁조의 인터미션> 소름이 돋는 광폭의 서정


 


[인터뷰365 소혁조] 에밀 길렐스는 내겐 무척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피아니스트이다. 누군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다섯 명을 대보라고 한다면 길렐스, 리히터, 박하우스, 하스킬, 그리고 현존하는 아티스트 중에 마르타 아르헤리치를 말하겠다. 하지만 딱 한 명만 고른다면 길렐스와 리히터를 놓고 잠시 고민하다가 길렐스를 꼽겠다. 다른 많은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두루 들어본 뒤에 결국 다시 찾아서 듣게 되는 사람. 내게 에밀 길렐스란 이름은 이런 의미로 다가온다.



그 누구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광폭한 힘과 소름이 돋는 듯한 정확한 터치. 하지만 그렇게 피아노가 부서져라 내리찍는 강철의 손가락 뒤엔 또 한없이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었던 사람. 사회주의 체제를 선전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구 소련이 자랑하는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어 온 세상에 명성을 떨친 그 이름. 바로 에밀 길렐스에 대해 이야기 해본다.



구 소련이 자랑한 일등 문화상품



길렐스는 우크라이나의 오데사 출신이다. 그의 부모님은 모두 음악가였고 음악을 좋아하는 가풍 덕분에 그는 6세의 어린 나이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처음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친 교사는 대단히 엄격하고 절도있는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특히 러시아 피아니즘의 전수자답게 대단히 큰 스케일을 강조하면서 끝없는 반복 학습을 통해 기교를 연마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어린 시절부터 경직되고 틀에 얽매인 교육을 받으며 자란 탓일까? 길렐스의 성격 역시 큰 변화를 추구하지 않았고 자유분방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명랑함보다는 항상 진지하고 사색적이며 때론 대단히 신경질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어릴적부터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웠고 성격적으로 괴팍한 면이 많았으며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을 만큼 변덕이 심했던 그의 친구 리히터와는 상반된 성격이다.


12세의 나이에 공식 데뷔를 하게 되었고 17세엔 제1회 전 소련 피아노 콩쿨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그의 이름이 전 소련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더 큰 공부를 하기 위해 19세에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모스크바로 간 길렐스는 너무도 유명한 스승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러시아 피아니즘의 대부격인 하인리히 네이가우스였다. 네이가우스 밑에서 수학하며 그는 진정 예술을 이해하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피아니스트로 변모하게 된다.



네이가우스의 가르침을 받은 길렐스는 그때부터 이미 소련에서 가장 자신 있게 내놓는 문화상품으로 각광받았다. 불과 20세의 나이에 빈 콩쿨 2위, 22세엔 브뤼셀에서 열린 이자이 콩쿨에서 1위로 입상하며 그의 존재를 서방세계에까지 널리 알릴 수 있었다. 그렇게 유명해진 덕분에 23세 때인 1939년엔 뉴욕에서 개최한 만국박람회에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함께 소련 예술가로는 처음으로 서방세계의 초청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뉴욕에서의 연주회는 성사되지 못했고 더 큰 예술가로서의 도약을 꿈꾸던 길렐스는 잠시 꿈을 접어야만 했다.



서방세계에 날린 문화 펀치



22세의 젊디 젊은 나이에 최고의 콩쿨에서 우승까지 거머쥔 길렐스. 그 젊은 나이에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까지 발탁되었으나 그는 바로 전쟁이란 뜻하지 않은 불운을 만나게 되었다. 전 세계를 집어 삼킨 전쟁의 화마 속에서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으면 천만다행한 그 급박한 상황. 길렐스는 여타의 많은 예술가들처럼 난리통을 피해 피난, 망명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가야 하는 곳은 바로 전장이었다. 전장의 일선에서 싸우는 병사들을 위한 위문공연을 다니게 된 것이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길렐스는 소련의 구석구석을 다 돌며 매우 성실히 위문공연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때의 영상기록은 지금도 남아 있다. 전투기가 하늘 위로 날아다니는 공군 비행장에서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 입은 길렐스가 피아노 앞에 앉아 라흐마니노프 전주곡을 매우 빠른 비트로 연주하고 공군 병사들이 박수를 쳐주는 장면이다. 그렇게 위문공연을 다니며 소련 정부에 충실했던 업적을 인정받아 1946년에 스탈린 상을 받게 된다.



전쟁이 끝난 뒤 길렐스는 처음으로 소련을 벗어나 1947년부터 곧바로 연주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다른 연주자들에 비하면 대단히 빠른 출세였다. 처음엔 동구권 쪽을 많이 다녔으나 이후엔 프랑스, 스위스, 벨기에 등에서도 공연을 하며 그의 명성을 유럽 전체에 다시 한 번 알릴 수 있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1955년. 길렐스에게 이 때는 그의 음악 인생에 한 획을 그은 기록적인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1954년에 소련의 인민 예술가의 칭호를 얻게 된 길렐스는 1955년에 다시 오이스트라흐와 함께 소련 예술가로는 처음으로 미국땅을 밟게 되었다.


팽생의 장기 중 하나인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며 길렐스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미국의 언론은 ‘강철의 피아니스트’라는 이름과 함께 그를 소개했고 그에게 무한대의 극찬을 보냈다.



길렐스와 오이스트라흐가 가진 미국에서의 첫 번째 연주는 2차 대전 이후 전 세계 양대 강국으로 군림했던 미국과 소련의 팽팽한 맞대결에서 소련이 문화적 펀치를 날린 것에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제아무리 미국이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강국이라 한들 문화에 있어서만큼은 소련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체념과 한계를 일깨워주었다고 할까?



사회주의 체제의 소련엔 이처럼 훌륭한 예술가가 있다. 사회주의에선 이처럼 훌륭한 예술가들을 양성해낸다. 그러므로 소련과 사회주의는 위대하다는 메시지를 길렐스의 강철타건을 통해 널리 알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이스트라흐, 길렐스의 원투펀치에 이어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부터는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레오니드 코간,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에브게니 므라빈스키, 키릴 콘드라신 등 수많은 소련의 우수한 예술가들이 소련을 벗어나 그들의 뛰어난 음악성을 널리 알렸고 이들의 음악은 서방세계의 음악 애호가들의 넋을 빼놓을 정도로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그 후 길렐스의 명성은 1960년대와 1970년대를 넘어서까지 계속 이어졌다. 프리츠 라이너, 조지 셀, 오이겐 요훔, 로린 마젤 등 서방세계의 쟁쟁한 지휘자들과 협연하며 수많은 피아노 협주곡을 녹음하였고 길렐스가 남긴 피아노 협주곡은 모두 동곡 최고의 전설적 명반으로 남아 있다.


이렇듯 한 시대를 풍미하며 국경과 이념의 구분 없이 전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린 거장 에밀 길렐스. 하지만 그의 마지막은 너무도 허탈했다. 지병에 걸려서 고생한 것도 아니었고 비행기 추락처럼 불가항력적인 사고로 의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건강 검진을 위해 입원한 병원에서 주사 한 대를 잘못 맞아 숨지게 된 것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69세였다.



길렐스의 어이없는 죽음이 너무도 안타깝고 허탈하게 느껴지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당시 길렐스는 독일 DG와 계약을 맺고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을 하고 있었는데 무려 10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계획된 대형 프로젝트였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은 길렐스가 바쁜 연주 활동 중에서도 큰 애착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그의 음악인생을 총망라하는 필생의 역작이었다.하지만 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이 대규모 프로젝트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 전곡 중 단 4곡만을 미완성으로 남겨진 채로 끝나고 말았다. 길렐스의 친한 친구였던 리히터는 길렐스의 죽음을 무척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사망 당시 크레믈린 병원에서 근무한 의사들을 맹비난하였다. 길렐스의 죽음은 순전히 의사들의 실수였기 때문이었다.



길렐스의 성격. 인간 길렐스



길렐스는 어린 시절부터 사회주의 방식의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개인의 자유와 인권은 제한되고 오로지 한 가지 목표만을 위해 양성되는 기계와도 같은 교육 시스템에 철저히 물들어서인지 그의 성격은 자존심이 강하지만 특별히 모나지도 않고 모험을 싫어하는 성격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인생 행적을 쭉 살펴보면 체제에 순응하였을 뿐 반기를 들거나 망명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그는 1942년에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바로 그것이 그가 처해있는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전쟁 중엔 최전방에서 싸우는 병사들을 위한 위문공연을 다녔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47년에 스탈린 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1954년엔 인민예술가의 칭호를 얻게 되었고 1962년엔 레닌상, 1976년엔 사회주의 노동영웅의 칭호를 받았다.




이와 같은 행적을 살펴볼 때 개인의 인권과 예술의 자유를 탄압하는 사회주의 체제에 반기를 들고 망명도 불사한 다른 예술인들-쇼스타코비치, 유디나, 로스트로포비치, 아쉬케나지 등-과 비교했을 땐 그가 용기가 없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세상 돌아가는 일에 아예 관심이 없고 그저 피아노에 파묻혀 사는 사람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정답은 후자일 것이다. 길렐스가 어떤 정치적 제스처를 강하게 했다는 기록 같은 건 찾아볼 수 없고 그는 그저 피아노에 파묻혀 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망명을 할 이유도 없는 것이 그는 매우 젊은 시절부터 국경을 초월하여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연주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특권을 누렸고 소련 정부에서 그를 적극 후원해주었으니 그랬을 법도 하다.


성격 또한 조용한 편이었고 때론 고집스러우며 좋고 싫음을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점에서 그의 친구인 리히터와는 크게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리히터는 대단히 고집이 셌고 변덕스러워서 연주회 당일에 바로 취소를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하지만 길렐스는 묵묵히 자기가 맡은 일을 하는 성격이었고 변덕이 심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일례로 한 레코딩 회사와 프로젝트로 전곡 녹음을 한 숫자를 보면 알 수 있다. 리히터의 경우는 어느 작곡가의 곡을 전곡 녹음한 경우를 찾기 힘들다. 하지만 길렐스는 조지 셀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녹음하였고 오이겐 요훔과는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전곡, 로린 마젤과는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전곡(이 곡을 전곡 녹음한 피아니스트는 거의 없다. 대부분 1번만 할 뿐이다)을 녹음하는 괴력을 선보였다.



예술의 세계에선 국경이란 의미가 없다. 미국에서 베토벤을 연주하는 사람이 있다면 소련에서도 똑같이 베토벤을 연주하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이념과 사상과 언어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지만 같은 악보를 보고 같은 연주를 하는 것만은 똑같다. 그들 세계엔 음악으로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 외엔 다른 어떤 것도 큰 의미를 둘 수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길렐스가 사회주의 체제에서 만들어진 음악가였고 한때는 그의 역사적 명반들을 들을 기회조차 봉쇄되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가 남긴 수많은 명반들이 지금까지 그 빛을 잃지 않고 음반매장에서 탑 프라이스를 유지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그의 피아노엔 세상의 모든 이념과 사상마저도 모두 수렴하는 아름다움만이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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