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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3/08/26 13:25:47  김다인




[인터뷰] 자전거 미대륙 횡단 7000km 이동훈
“70일동안 매일매일 새로운 사람을 위해 달렸다”


 

【인터뷰365 김다인】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오래된 격언이 있다. 하지만 굳이 고생을 사서 할 필요까지 있나, 하는 것이 요즘 젊은이들의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고생없이, 구부러진 길로 돌아가지 않고 탄탄대로 시야 뻥 뚫린 아우토반을 달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고생을 사서 하는 청춘도 있다. 청년 이동훈(25)이 그 중 한 사람이다. 이동훈씨는 지난해 5월부터 70일 동안 ‘4K For Cancer’ 프로젝트에 참여해 자전거를 타고 미국 대륙을 횡단했다. 그리고 그 대장정 기록을 ‘미대륙 횡단 7000km 프로젝트’라는 책으로 엮어냈다.
‘4K For Cancer’ 프로젝트는 지난 2001년 미국 존스홉킨스대학교 대학생 5명이 자전거로 미국을 횡단하며 암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암 환자를 위한 성금을 모은 데서 시작됐다. 이후 비영리단체로 등록을 하고 매년 30여 명의 대학생들이 볼티모어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7000km를 70일간 자전거로 횡단하며 암 환자들을 물질적 정신적으로 돕고 있다. 학생들의 참여가 늘면서 2011년부터는 2개 팀이 더 결성, 총 3개 팀이 볼티모어를 출발해 각각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포틀랜드까지 달리고 있으며 올해는 샌디에이고로 가는 팀도 추가됐다.
이동훈씨는 왜 그 힘든 여정을 택해, 사서 고생을 했을까. 왜 온몸의 근육을 쥐어짜는 고통을 이겨내며 록키산맥을 넘었을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미국 위스콘신주립대학교에 재학중인 이동훈씨와 이메일 인터뷰를 청했다.

 

위스콘신주립대 재학중으로 알고 있다. 전공은 무엇이고 언제 유학을 떠났는가.
강남초등학교, 반포중학교 졸업, 세화고등학교 1학년 1학기까지 다니다가 미국 위스콘신의 고등학교로 유학을 결심했다. 한국에서 배우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글로벌 언어인 영어를 배우겠다는 생각 하나로 유학을 떠났다. 현재 위스콘신주립대의 화이트워터 캠퍼스 회계학과에 재학 중이다.

 

회계학을 전공으로 택한 이유는 무엇인지.
어릴 때부터 언어와 숫자를 좋아했다. 회계는 비즈니스의 언어이기 때문에 숫자와 언어를 좋아하는 나에게 잘 맞는 듯싶다. 또한 회계사로 커리어를 시작하면 많은 길이 열릴 것이라는 주위 사람들과 선배들의 조언을 듣고 결정했다. 졸업 후에 미국에서 유학생 신분으로 비자를 받고 일하기에 비교적 확률이 높았던 점도 크게 작용했다.


암의 위험성 알리기 위해 달리는 7000km


인사가 끝났으니 달려보자. 4K For Cancer에서 4K는 무슨 뜻인가. 단체에 대해서도 설명해달라.
사람들은 4K가 4킬로미터인 줄 아는데 사실 미국에서 K는 1000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4K는 4000마일을 뜻한다. 동부해안에서 서부해안까지 미국을 가로지르는 거리가 보통 4000마일(약 6437km)이다. 4K For Cancer는 암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4000마일을 달린다는 뜻이다. 매년 여름 대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미국을 가로지르며 암에 대한 위험성을 일깨우고 도중에 만나는 암 환자들에게 힘을 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이 매일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으로 겪게 되는 고통과 우리가 자전거를 타며 느끼는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인 고통을 간접적으로 비교함으로써 그들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출발 전 유니폼을 받은 기념으로 트레이닝을 나간 날

 

4K For Cancer에서 주최하는 자전거 대륙횡단에 참여한 이유는 무엇인가.
캘리포니아에 교환학생으로 가있던 고3 때 한국에 계신 어머니가 갑상선암에 걸리셨다. 난  어떤 일도 해드릴 수가 없었다. 다행히 어머니는 완쾌하셨지만 그 후로 어머니는 물론이고 암이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더 잘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침 초등학교 친구 (문)경인이로부터 이 단체에 대해서 듣게 됐다. 2011년 공군으로 군 복무를 마치고 9월 학기까지 시간이 남아 이태원 부근 영어학원에서 아이들 가르치고 있을 때, 경인이가 자신이 교환학생으로 가게 될 볼티모어의 한 학교에 4K For Cancer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같이 해보지 않겠느냐고 해서 시작됐다.

 

어떤 방법으로 지원자를 선정하나.
2011년 9월 4K For Cancer 웹사이트에서 원서 지원이 시작됐고 적정 인원이 차게 된 후에 전화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는 참가하게 된 이유, 적성, 체력 등 다각도로 상당히 까다롭게 진행됐다. 통과자는 웹사이트를 통해 암 환자를 위한 기금 4500달러를 모금했다. 모금액이 절반쯤 달성되니 주최 측으로부터 자전거가 배송됐다.

 

이동훈씨가 참여한 2012년 횡단 여행에는 어떤 사람들이 함께 했나.
의대 가려는 학생들이나 의학 쪽 관련 전공 학생이 많았다. 비즈니스(특히나 회계) 전공은 나와 경인이밖에 없지 않았나 싶다. 자기의 조국을 보겠다며 여행에 나선 친구들도 있었고 온전히 암에 대한 생각으로 지원한 친구도 있었다. 나처럼 가까운 가족, 친지, 친구들이 암으로 세상을 뜨거나 고생했던 것이 동기부여가 된 친구들도 있었다. 내가 속한 샌프란시스코팀은 나를 포함해 29명이 달렸다.

 

대륙 횡단 코스는 어떻게 짜여져 있나. 자세하게 알려달라.
대서양과 맞닿아있는 메릴랜드 주에서 출발하여 애팔래치안 산맥이 지나는 버지니아 주, 켄터키 주, 테네시 주, 미주리 주, 아주 평평하고 그늘 한 군데 찾기 힘들었던 무지 더운 캔자스 주, 록키산맥이 있는 콜로라도 주를 넘어 레드 록(붉은 색의 돌산이 많은) 및 협곡이 멋진 유타 주를 지나 네바다 주, 그리고 드디어 캘리포니아 주로 입성했다. 작년에는 콜로라도 주에  큰 산불이 있어서 코스를 도중에 바꿨어야 했다. 동부에서 서부로 횡단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항상 서부 쪽으로 달렸다.

 

자전거로 70일 동안 대륙을 횡단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준비는 어떻게 했나.
매주 금요일에 15km 정도씩 자전거를 타는 1학점짜리 ‘사이클링’ 수업에 등록을 해서 반강제(?)적으로 준비를 했다. 내가 워낙 운동을 좋아해 좀 과신한 면도 있었다. 하지만 대륙 횡단을 시작하고 3주 정도는 매일 밤 다리에 쥐가 나곤 했다. 결과적으로는 횡단을 하면서 트레이닝이 된 것 같다.

 

본인이 가져갔던 특별한 준비물은 어떤 것이 있나. 예를 들면 고추장 같은 비상식량이라든가.
더블백 하나에 모든 것을 넣어야 해서 꼭 필요한 것만 가져갔다. 특별한 준비물이라고는 비타민, 영양바, 초콜릿바, 물에 타먹는 수분보충제 등이 전부였다.


첫날, 갑상선암 걸렸던 어머니 위해 달리다

 

자전거를 타고 떠난 첫날, 그 기분이 어땠나.
황홀하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이는 게 맞지 않나 싶다. 이 날이 정말 왔구나 라는 생각에 흥분됐고 얼굴에는 비장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처음 만나 낯선 팀원들을 더 잘 알고 싶어서 계속 말을 걸었던 기억도 난다. 

 

첫날 다리에 MOM(엄마)을, 둘째 날에는 DAD(어버지)를 쓰고 달렸다.
첫날 다리 양쪽에 ‘MOM DAY1’이라고 쓰고 달렸다. 이튿날은 ‘DAD DAY2’였고. 날짜에 따라 매일 다른 사람(이름)을 적고 달린 것인가.
그렇다. 70일 매일 매일을 특별한 하루로 만들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 어머니를 위해 첫날을 헌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지도 심장병으로 많은 고생을 하셨기 때문에 이튿날은 아버지를 위해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그리고 나에게 4500달러를 기부해준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에 있는 그 누군가를 위해 내가 하루를 헌신할 수 있을까를 물어봐서 그들을 위해서도 달렸다. 다리에 그들의 이름을 쓰고 그들을 기억한 것이다. 횡단이 끝나고 몇몇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요청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진 내 두 다리 사진을 주었더니 정말 고마워했다.

 

하루 평균 몇 km를 달렸나. 목적지에 다다라서 숙박과 식사는 어떻게 해결했나.
보통 100km는 거의 넘겼다. 평균 약 120km 되는 것 같다. 한 사람당 4500달러씩 모은 돈은 전액 암환자를 위해 쓰자는 것이 우리 단체의 취지였기 때문에 숙박과 식사는 100% 무료로 제공을 받았다. 숙박은 교회, 학교, YMCA 등 강당이나 큰 공간이 있는 곳에 머물렀다. 텐트를 치고 야영도 했다. 식사는 조를 정해 음식점을 들어가 우리의 단체와 사명에 대해 설명하고 기부를 받았다. 피자헛, 맥도날드, 버거킹 등 유명한 패스트푸드점들은 물론이고 개인이 운영하는 음식점에서도 흔쾌히 많은 양의 음식을 기부해줬다.

 

수십 명이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데 룰이 있었을 것이다. 어떤 룰이 있었나.
우리가 법처럼 정하고 따른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안전이 중요했기 때문에 ‘절대 그룹을 떠나서 혼자 자전거를 타는 등 개인행동의 금지’였다. 한 그룹에 5명 정도씩 무리지어 달리는데 항상 그 날 자신이 속한 그룹과 같이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룰이라면 룰이었다.

 

첫날 달리는 것을 시작으로 무려 70일을 달렸다. 그동안 갖가지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사고는 없었나.
내게 일어났던 가장 큰 일은 차와 작은 접촉사고가 났던 것뿐이다. 하지만 내리막길에서 빠른 속도로 내려가다가 크게 다친 친구들도 많았다. 샌디라는 여자 팀원은 입술 윗부분이 심하게 까져서 10바늘을 꿰맸는데 1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완벽한 상태가 될 정도로 심한 부상이었다. 캔자스 주에서는 40도가 넘는 더위에 팀원인 앨리스가 열사병에 걸리기도 했다.

 

가장 힘들었던 코스는 어느 코스였나.
가장 기억에 남는 힘든 코스는 14일째 일명 ‘독수리 산’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시작한 지 2주밖에 되지 않아 육체적으로도 100% 트레이닝 되지 않은 무렵이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이곳은 겨울이 되면 경사가 너무 급해 차들도 다니지 못하는 구간이다. 경사가 25도에 이르기까지 했다. 특히나 여자 팀원들이 정말 힘들어했는데 울면서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올라가는 그들을 보며 감동을 받았다. "왜 울면서 고통을 받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페달을 돌리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록키산맥을 넘어갈 때는 고산병 때문에 고생했다. 캔자스 주는 그늘 한군데 찾을 수 없는 40도에 육박하는 날씨에 평평한 곳을 계속해서 달렸다. 오히려 오르막길이 있고 내리막길이 있으면 경치도 바뀌고 리듬이 생기는데 계속 평지에서 120km 넘게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알렉스라는 친구는 자전거를 타면서 잠이 들어 넘어지기도 했다.

 

달리면서 가장 경치가 좋았던 곳은 어디이며 경이로웠던 순간은 언제였나.
경치가 멋진 곳은 콜로라도 주와 유타 주이다. 콜로라도 주의 록키산맥을 올라서서 우리가 올라온 곳을 보며 뿌듯했고 경치를 즐기며 내리막길을 내려갈 수 있었다. 유타 주에는 많은 국립공원이 있었는데 협곡들 등 붉은 색의 돌산들이 너무나 멋졌다. 한 군데를 꼽으라면 콜로라도 주의 에스터스 파크를 뽑겠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암 환자인 크리스티와 만났을 때. 나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I will never forget about you"라고 말해줬던 때이다. 한 사람의 인생에 희망을 주었구나 라는 생각에 지금도 마음 한구석이 찡하다.

 

횡단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나. 있었다면 언제이고 어떻게 극복했나.
평지가 계속되던 캔자스 주, 록키산맥을 올라가며 고산병이 생기던 때 등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 때. 하지만 포기라는 단어가 떠오르면 곧이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암환자들에게 ‘포기’는 ‘죽음’을 뜻한다. 내가 여기서 포기해 버리면 내 다리에 써있는 사람의 삶을 내가 포기해버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팀원들의 등을 서로 밀어주기도 하며 서로 격려를 하며 이겨냈다.

 

달리면서 어떤 생각을 했나.
"내가 오늘 누구를 위해 이 일을 하고 있지?" 라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다. 또 지금까지 몇 킬로미터를 왔는가, 얼마나 더 가야 하는가 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

 

록키산맥을 바라보며

 

협곡이 멋진 유타주에 도착.


가는 곳마다 만난 사람들에게서 많은 힘 얻어

 

자전거 횡단 팀에 보내는 미국민들의 성원은 어땠나.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면.
미국인들의 성원은 대단했다. 가는 곳마다 우리를 크게 맞아주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트럭에 과일을 싣고 파는 할아버지이다. 할아버지는 그날 자신의 수입과 남은 과일 전부를 기부해 주셨다. 액수로는 더 큰 기부를 받은 적도 많았지만 자신도 하루하루 벌어서 살아가는 분 같았는데 선뜻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주는 모습이 정말 감명 깊었다.

 

횡단 도중 만난 암 환자들도 있나.
말기에 있는 분들은 만나지 못했지만 이제 막 암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부터 항암치료를 하고 있는 사람들까지 다양하게 만났다. 내가 만난 환자들은 긍정적이었다. 환자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는 강했고 정신적으로도 강했다.

 

중간중간 홈스테이를 하면서 잊지 못할 일들이 있다면.
네바다 주에서 캘리포니아 주로 넘어가면서 타호 호수라는 곳에 엘카 아저씨네 집에서 홈스테이를 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되고 혼자 사는 분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우리처럼 미국 횡단을 꿈꾸며 트레이닝을 하고 계셨는데 준비 도중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엘카는 우리가 마치 자신의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해서 해주는 사람들이라 여겼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낙심이 컸는데 우리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다시 사회에 적응하고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도 연락을 하며 지낸다.

 

마지막 날 출발할 때 기분이 어땠나. 이날 다리에는 누구를 썼나.
첫날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 드디어 이날이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홀했던 첫날과는 다르게 이날은 무언가 엄숙했다고 해야 할까. 이날 다리에는 한글로 ‘어머니’라고 썼다. 첫날을 어머니께 바쳤던 것처럼 마지막 날도 어머니께 바침으로써 이 여행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종착점에 들어와서는 우리 팀원들 서로 안아주며 서로 축하를 해주었다. 드디어 도착해서 기뻤고 뿌듯했지만 이제 끝이라는 생각에 정말 섭섭했다.

 

함께 달린 팀원 가운데 자신은 어떤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나. 팀원과는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는지.
난 우리 팀에 긍정적인 생각을 퍼뜨리려고 했다. 포기하려는 친구들이 생기면 우리가 왜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는지 다시 얘기하는 등.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친구였던 경인이와 더 가까워지고 평생 같이 할 추억이 생겼다는 것도 참 기쁘다. 팀원들과는 페이스북에 그룹을 생성하여 지금도 서로 안부를 전하며 지낸다. 얼마 전에는 물리치료사인 패트릭이 볼티모어부터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길에 시카고에 들러 나를 보고 갔다.

 

횡단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인가. 몸무게는 얼마나 줄었나.
횡단이 끝나자마자 나는 경인이와 크리스마리와 같이 8일 동안 차를 운전해서 샌프란시스코부터 볼티모어까지 갔다. 우리 자전거 횡단을 보조해준 차량을 4K For Cancer 본사가 있는 볼티모어에 가져다줘야 했기 때문이다. 별일이 없었던 우리 셋이서 지원했다. 미국 운전면허증이 나밖에 없어서 내가 하루에 750km씩 운전을 계속했다. 그 일을 끝내고 드디어 집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3시쯤이었는데 그 날 밤까지 계속해서 잤다. 몸무게는 5kg 정도 빠진 것 같다. 횡단할 때 하루에 4000~5000 칼로리를 먹었는데도 몸에 지방이 거의 안 남았었다. 횡단이 끝난 후에는 하루에 그만큼씩 자전거를 안 타니까 몸이 근질근질했다.

 

70일 동안 7000km를 함께 달려온 팀원들. 이들을 비롯해 횡단을 하는 동안 만난 많은 사람들은 이동훈씨의 큰 자산이다.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이고 싶다

 

자전거 횡단여행으로 무엇을 얻었나.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얻은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 횡단을 하며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내 인생을 살아가는데 큰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스펙을 떠나 나만의 스토리를 쌓을 수 있었던 멋진 70일이었다.

 

부모님은 자전거 횡단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가.
처음부터 두 분 다 100% 전적으로 밀어주셨다. 부모님께서는 나를 워낙 잘 믿어주시기 때문에 내가 결정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믿고 시켜주신다. 내가 여태까지 살아오며 하고 싶었던 일을 부모님께서 반대하셔서 못한 적은 없다. 항상 도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보라고 밀어주시는 부모님께 정말 감사드린다. 다만 그만큼의 자유를 주시는 대신에 나는 내 행동에 책임을 지려고 노력한다. 한번 신뢰가 무너지면 다시 쌓기 힘든 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현재 회계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앞으로 자신의 미래는 어떻게 설계하고 있나.
일단은 미국의 회계 4대 법인에서 일을 시작하고 싶다. 단순한 감사나 세무 같은 회계사 일보다는 좀 다른 일에 들어가려고 한다. Forensic accounting이라고 법회계학 쪽으로 나의 특기를 살려보려고 한다. 사람들이 남을 속이고 부당하게 부를 축적하는 것을 혐오하기 때문에 나에게 잘 맞는 분야 같다. 뭔가 금융계의 탐정이라고 할까. 이번 여름에 딜로이트에서 인턴십을 했는데 2014년 여름에 같은 회사 법 회계 팀에서 인턴십을 하게 되어 있다. 그 후의 일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면 미래가 열릴 것이라 생각한다.

 

서른이 넘고 마흔이 되어가며 이동훈이라는 이름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기를 바라는가.
‘끊임없이 도전하는 자’라는 수식어가 붙었으면 한다. 하루하루 같은 생활은 나에게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항상 새롭고 도전되는 일을 찾아 바쁘게 살고 싶다.

 

다른 공간이지만 동시대를 살고 있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한마디.
한국에서 치열하게 취업 준비는 물론이고 회사 생활을 시작해서도 바쁘게 사는 젊은이들을  존경한다. 하지만 자신에 대해 진정한 투자를 해보길 권하고 싶다. 누구를 위한,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스펙이 아닌, 자신이 즐길 수 있고 자신이 뜻깊다고 생각되는 일에 올인해서 도전하는 삶을 살았으면 한다. 40대가 되고 가족도 생기고 하면 선뜻 하기 힘든 일들을 지금 찾아서 떠나 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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