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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6/05/04 16:04:25  정중헌




[인터뷰] 한국 연극을 풍요롭게 하는 영민하고 개성 강한 연출가 김광보의 무대 인생
제18회 이해랑연출상 수상한 연극계 차세대 주역


국립극단 마당에서 환하게 웃은 연출가 김광보. 2014년.

 

【인터뷰365 정중헌】“저는 1982년 12월 부산의 한 극단의 단원으로 연극을 시작했습니다. 1994년 <지상으로부터 20미터>라는 작품으로 연출 데뷔를 했습니다. 제 연극 세월도 어느덧 33년, 연출로 보낸 세월이 22년입니다. 그동안 많은 난관을 겪었고 이리 갈까 저리 갈까 헤매었습니다. 그때마다 많은 도움을 주신 분들이 있습니다. 임영웅 선생님, 손진책 선생님, 심재찬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분들은 오늘의 저를 만들어준 은사이십니다.
오늘 이해랑연극상을 수상하면서 제가 걸어온 길이 결코 헛된 길을 아니라는 확신을 얻었고 조그만 자부심도 느낍니다. 지금까지는 저 자신을 위해서 연극 인생을 걸어왔다면 앞으로는 후배들이 보다 안정적으로 이 길을 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이 상에 보답하겠습니다.”

2016년 4월18일 오후 서울 정동의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열린 제26회 이해랑연극상 시상식에서 수상자인 김광보(52) 서울시 극단장은 이 같은 요지의 수상소감을 피력했다.
작달막한 체구에 말 주변도 어눌했지만 안경 넘어 눈매는 날카롭게 빛을 발했다. 평소 흑색 일색이거나 무채색 계열의 작업복만 입다가 이날 수트에 넥타이까지 맨 그의 외모는 왠지 좀 낯설어 보였지만, 그의 표정에는 온갖 풍상을 이겨내고 영예를 안은 자부심이 은은한 미소로 배어나오는 것 같았다.
연출가 이해랑 선생(1916~1989)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이해랑연극상은 상금 5천만 원의 연극계 최고의 상으로 꼽히고 있다. 그간 이호재 권성덕 전무송 윤주상 유인촌 정동환 박정자 손숙 윤석화 김성녀 등 기라성 같은 배우들과 임영웅 손진책 이성열  등 연출가, 무대미술가 박동우, 기획자 박명성 등이 수상했다.
시상식에서 김광보 연출가는 트로피와 심사평이 수록된 기념패를 받았고, 돌싱인 관계로 상금은 22세 외동딸에게 전해졌다.

 

김광보는 왜 화제의 연극인인가?
김광보. 그는 누구이고, 어떻게 연극에 입문해 어떤 작품을 어떻게 만들었기에 50대 초반에 이 상을 거머쥐었을까?
그는 1년에 7~8편을 무대에 올릴 만큼 활동이 왕성하고, 올리는 작품마다 흥행성 작품성 양면에서 그 시즌 손꼽히는 무대로 평가받고, 셰익스피어부터 창작 뮤지컬까지, 소극장 공연부터 중대극장 공연까지 연출 폭이 매우 넓은 한마디로 연극계 차세대 주역이다.
이 인터뷰는 필자의 이 같은 호기심에서 출발했다.
연극기자를 했던 연으로 지난 반세기 넘게 수많은 공연을 보아왔지만 눈에 띄는 수작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몇 년 간 연극동네를 다니면서 눈길을 끄는 중견 연출가들이 생겼고 그 중 하나가 연출가 김광보이다.
사실 필자는 그의 작품을 많이 보지 못했다. 최근작부터 꼽아보면 <헨리 4세 파트 1 & 파트 2-왕자와 폴스타프>, <나는 형제다>,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등 주로 국공립 단체나 공연장에서 했던 작품들이다.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극단 청우나 초청 연출작들은 접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럼에도 큰 기대를 걸지 않고 본 작품 중에 연출이 눈에 잡히거나 전편에 흐르는 긴장과 에너지, 배우들이 돋보이는 무대 뒤에는 김광보가 있었다. 매 번 만족하지는 못했지만 이제 김광보 연출이라면 믿고 볼 수 있는 공신력과 친화력이 생긴 것이다.
인터뷰는 이해랑연극상 수상자로 발표된 몇 주 후인 4월 중순, 세종문화회관 뒷마당 노천카페에서 진행됐다.

 

운명처럼 밀고 들어 간 쪽문에서 연극인생 시작
정중헌 : 연극 전문 상으로 꼽는 이해랑연극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김광보 : 감사합니다. 받고 싶었는데 막상 받게 되니 굉장히 부담이 되네요. 연극의 시작 동기와 과정으로 볼 때 과연 상 받을 만큼의 성과가 있었는지 저를 돌아보게 되더군요. 아마도 다른 길로 가지 않고 정통 연극의 맥락을 지켜왔기에 큰 상을 주신 게 아닌가 생각해요. 수상 소식을 들은 후 상의 무게감에 부담이 된 것도 사실이에요. 수상을 계기로 나 자신을 성찰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후배들이 좀 더 안정적으로 연극할 수 있는 토대를 놓을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정 : 수상 소감 속에 김광보 연극 인생이 압축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고교 졸업을 앞두고 알바를 하는 과정에서 부산의 한 극단 문을 열고 들어가 연극에 입문하여 밑바닥부터 익혀 홀로서기 까지 얼마나 난관이 많았고 고생이 심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대학에서 전공을 해도 해내기 힘든 연출을 독학으로 해냈다는 점도 대단하지만 흥행과 비평 등 두 마리 토끼를 잡아 온갖 상을 휩쓸었다는 것은 ‘인간 승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김 : 시상식에서 말했듯이 오늘의 저를 있게 한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난관에 부딪치고 갈팡질팡 할 때 제게 도움을 주고 이끌어준 세 분 선생님과 부산 극단 시절 연극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몸으로 익히게 해준 선배 여러분들, 그리고 저를 믿고 따라준 극단 식구들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정 : 자 그럼 김광보의 연극 인생을 되돌아볼까요? 부산이 고향이시네요. 금성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연극에 입문한 계기가 있었다면서요?
김 : 그건 전혀 뜻밖의 일이었어요.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창시절 마지막 겨울 방학에 통신배달 행낭을 나르는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어느 날 행랑을 들고 길을 가다가 양철로 덧댄 일본식 건물 쪽문에 붙어있던 낡은 공고를 읽었어요. 극단에서 연구단원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는데 그걸 읽자마자 저도 모르게 그 쪽문을 밀치고 들어갔어요. 그 때 왜 그랬는지 지금도 설명이 안 되는 돌발적인 일이었거든요. 전 그저 운명이라고 믿고 있어요.
정 : 연극적으로 표현하면 운명의 신이 광보씨로 하여금 그 문을 열게 한 것이군요. 남들은 대학 갈 준비에 바쁜 시기에 알바를 해야 했던 사정이 있었던 거군요.
김 : 어려서는 유치원에 보낼 만큼 집안이 괜찮았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들어가서 부터 가세가 기울었었요. 항만에서 하역 일을 하던 아버지가 불법 거래에 연루돼 일을 못하게 됐거든요. 6남매의 넷째인 저는 고 1때부터 대학 진학은 포기하고 알바를 하거나 어머니 포장마차 일을 도왔어요.
정 : 어떻게 도와나요?
김 : 어머니 포장마차를 제가 만들어 드렸어요. 리어카에 천막을 씌우고 나무를 잘라 조리대도 짰지요. 어머니는 길가 포장마차에서 꼼장어와 돼지불고기를 구워서 저희 가족을 먹이셨어요. 그런 형편에서 대학 진학은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포장마차 영업이 끝날 때쯤 나가 마무리 일을 하고 막차타고 집에 가는 게 일과였으니까요.
정 : 예전에 저도 비슷한 환경이어서 고3 때 일자리를 찾겠다고 학교 담을 넘다 선생님에게 호되게 야단맞은 적이 있는데 광보씨는 어땠나요?
김 : 저 역시 일탈할 뻔 했는데 선생님이 잡아주셨어요. 부산에는 국제상사라고 신발 만드는 큰 공장이 있어요. 고 1때 너무 힘들어 자퇴서를 내고 그 공장에 들어가려고 했다가 선생님에게 마구 맞고 또 맞았어요. 그 선생님은 저를 때리면서 “자퇴 할래, 학교 있을래” 택일하라고 다그쳤어요. 너무 무서워 학교에 있겠다고 했어요. 그 선생님 덕에 고등학교 졸업을 한 것이지요.
정 : 어린 시절 희망적으로 지내지는 못했지만 책을 많이 읽었다면서요?
김 : 초등 2학년 이후 가세가 기울어 중고교 시절 한 끼 밥 먹기도 힘들었어요. 삶이 막연했지요. 그래도 중학교 2학년 때 국어 선생님의 영향으로 책을 많이 읽었어요.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니체의 전집,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국내 작가들에게 심취하여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를 읽었어요. 영어 공부 시간에 소설책 읽다가 들켜서 매를 맞기도 했으니까요.
정 : 겨울방학 때 했다는 통신행랑 배달은 어떤 일이었나요? 
김 : 아침에 서울에서 오는 서류나 물품을 주소지로 배달하고 저녁에는 서울로 보낼 물건들을 행랑에 담아 열차에 실어 보내는 일이었어요. 그 알바를 1년이나 했으니 답답했고 뭔가 출구를 찾으려는 시기에 극단의 단원 모집 공고를 보게 된 것이지요.
정 : 중고교 시절에 연극을 보거나 해 본 적이 있었던 건가요?
김 : 그 때까지 연극이라는 것을 본 적이 전혀 없었어요. 이걸 하리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고요.
정 : 그야말로 이유나 목적도 없이 무의식중에 문을 열고 들어간 것이군요. 어떻던가요 그 안이?
김 : 삐거거리는 일본식 목조건물의 낡은 계단을 밟으며 올라선 이층 입구에서 잠시 주저했어요. 작은 창문을 통해 들여다본 내부는 열띠고 진지한 토론의 현장이었어요. 자욱한 담배 연기와 연탄난로 위의 구겨진 주전자가 뿜어내는 수증기, 트랜지스터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그리고 술잔이 오가기도 했어요.
정 : 그 안으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용케도 용기를 냈군요?
김 :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미는 한 사내의 기운에 떠밀려 엉겁결에 문을 밀치고 그곳에 들어서고 말았어요. 모두의 놀란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우물쭈물 워크숍 단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왔다는 말을 꺼냈던 것 같아요.
정 : 어떤 극단이던 면접은 하지 않나요?
김 : 그 자리에서 바로 오디션이 진행되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처구니없는 오디션이었지요. 기껏 오르막을 오르라고 해서 오르는 시늉을 했고 다시 내리막을 내려가는 시늉을 하라고 해서 했을 뿐인데 그걸로 합격이었어요.

 

2012년 동아연극상 작품상을 수상한 극단 청우의 <그게 아닌데>.

 

추송웅처럼 하라는데 자의식 때문에 그게 안 돼 연기는 포기
정 : 졸업 전이니까 고등학생 신분으로 연극의 길로 들어선 셈이네요. 극단 생활은 어땠나요?
김 : 알바 시간을 제외하곤 거의 극단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극단의 학구적인 분위기에 완전히 매료당했거든요. 매일 한 작가의 작품을 선정해 읽고 분석하고 토론했어요. 그때 제가 만난 작가들이 외젠 이오네스코, 사무엘 베케트, 아라발, 앙토냉 아르토, 에드워드 올비, 유진 오닐, 피터 셰퍼 등인데 그들의 희곡을 섭렵했어요. 몇몇 작가를 제외하고 거의 부조리극 계열의 작가들이었어요. 당연히 영국의 평론가 마틴 에슬린의 『부조리 연극』은 필독서였고, 한국연극협회가 발간한 70년대  월간 ‘한국연극’은 교과서였어요.
정 : 희곡부터 읽고 분석했다면 연극 공부를 많이 시켰네요. 공연은 하지 않았나요?
김 : 첫 워크숍 공연으로 외젠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를 연습했는데 제가 맡은 역은 소방대장이었어요. 부조리극이라 이해하기도 어려웠는데 어느 날 연출께서 저보고 추송웅처럼 연기하라는 거예요. 드라마 <달동네>의 똑순이 아버지로 기억되는 추송웅 선생님은 TV 탤런트이기도 했지만 <대머리여가수>에서 소방대장 역은 물론 에드워드 올비의 <동물원이야기>에서 제리 역을 해낸 유명한 연극배우라는 사실을 스터디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따라하려니 영 안 되는 거예요.
정 : 제1회 전국연극제가 부산에서 열렸을 때 취재를 갔었는데 부산 극단의 작품은 사투리가 심하게 나와 대중화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었어요.
김 : 부정확한 발음과 사투리도 문제였지만 몇날 며칠을 흉내 내도 추송웅처럼 안 되는 거예요. 저를 강하게 가로막고 있는 자의식이라는 놈이 끝까지 저 자신을 해방시켜 주지 않았어요. 그때 깨달았어요. 전 배우가 될 수 없음을요.
정 : 그래서 연출을 하게 된 것이군요. 그러니까 광보씨는 대학에서 배울 텍스트와 연극이론을 스터디 그룹에서 익힌 것이군요.
김 : 운명적이라고 밖에 표현이 안 되는 극단에 들어가 인간적인 동질감, 공유, 배려… 이런 것들을 느꼈어요. 연극은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하더라고요. 현장에서 작업하는 것이 좋았어요. 극단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당시 희곡전집을 사서 열심히 읽었어요.
정 : 스터디그룹이 빡 셌다면서요? 
김 : 좀 힘들고 벅차기는 했어도 그 스터디 그룹을 통해서 연극에 입문했고, 텍스트 읽는 법과 분석하는 법을 배웠고, 또 그것이 연습에 어떻게 응용되는지도 배웠어요. 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배움은 형태에 치중하는 겉치레의 연극이 아니라 삶의 본질을 통찰하는 연극 그것이 최고라는 선배들의 가르침이었어요.
정 : 그 선배 분들은 누구이며 지금 연극을 하고 있는지요?
김 : 제가 입단한 부두극장에서 워크샵을 주도하며 저를 이끌어 준 형들은 우창호 조문선 김경수 세 분인데 지금은 연극을 안 하고 부산에서 소시민으로 살고 계세요. 저는 이 형들에게 연극에 임하는 자세는 물론 사소한 것까지 익혔어요. 그 스터디 그룹에서 보낸 3개월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나에게 자양분을 공급하고 있어요.
정 : 아까 자의식을 떨치지 못해 배우를 그만두었다고 했는데 그 자의식이란 어떤 건가요?
김 : 누가 뭐라고 한마디 하면 견디지를 못하는 거예요.
정 : 그럼 바로 어떤 일을 했나요?
김 : 배우는 도저히 안 돼 조명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당시 ‘한국연극’ 지에 유덕형 서울예대 학장의 인터뷰가 실렸는데 조명을 알아야 연출을 할 수 있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어요. 조명 기재가 열악하던 시절이어서 소금물을 끓여 밝기를 조정하기도 했어요.
정 : 조명 스태프가 된 거네요.
김 ; 조명 스태프로 연습에 참여하면서 연출의 디렉션을 충실하게 들었어요. 대상을 입체화 시키는 것이 조명의 역할이기에 어떻게 하면 조명을 더 효과적으로 할까를 고민하다가 전자공학과 다니는 친구에게 회로도를 그려 달라고 해서 디머기를 직접 만들기도 했어요. 나이트클럽에 놀러가도 저 조명을 연극에 어떻게 활용할까 그런 생각 많이 했어요.
정 : 부산 연극계에서 조명 잘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요?
김 : 극단의 조명을 해오다가 1988년 부산 문화회관의 조명기사로 픽업되어 만 2년 1개월 근무했어요. 여러 작품의 조명을 하면서 연극의 구조를 익힌 것이 연출 작업에 큰 도움이 되더군요.

 

‘문화 게릴라’ 이윤택에게 연출 수업 받아
정 : 부산 문화회관 조명 담당이라는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1990년 서울로 올라왔는데 그 이유가 뭔가요?
김 : 이윤택 선생님과 작업하고 싶어서 였지요. 당시 이 선생님은 ‘불의 기쁨 밥의 평화’라는 시집(공저)을 내셨는데 저는 ‘ing'라는 시의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어요.
“나는 ing를 사랑한다”로 시작되는 시인데 마지막에 게오르그 뷔히너의 희곡 <보이체크>에서 따온 ‘달려라, 달려라, 백마야!’가 특히 좋았어요. 제 삶이 ing인가 생각 되었어요.
정 : 시인이고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이윤택과의 만남이 시작된 것이군요. ‘문화 게릴라’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이윤택이 많은 실험적인 작업을 하던 시기군요.
김 : 이윤택 선생님이 기자를 그만 두고 1986년 부산에 가마골소극장을 열었어요. 이 소극장에는 이윤택의 연희단거리패와 제가 속했던 부두극장이 6개월씩 공유하기로 했는데 제가 극장장 겸 무대감독을 맡았어요.
정 : 이윤택 연출의 영향을 많이 받았겠네요.
김 : 가마골소극장에서 부두극장은 부조리극을 주로 공연했고, 이윤택 연출은 연희단거리패를 만들어 첫 작품으로 <푸가>를 공연했어요. 이어 <시민 K>, 홍가이 작 <히바쿠샤> 등을 공연했는데 저는 그 작품의 조명 겸 무대감독으로 관여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지요. 연출 초기에는 이윤택 스타일과 비슷했지만 계속 하면서 지금은 달라졌어요.

 

2014년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해 호평을 받은 김광보 연출 <사회의 기둥들>의 한 장면.

 

창작극 <지상으로부터 20미터>로 연출 데뷔 후 극단 청우 창단
정 : 부산에서 수련기를 거쳐 1994년 서울로 올라와 극단을 만들었다면서요. 연출 데뷔작은 무엇인가요?
김 : 장우제 작 <지상으로부터 20미터>로 연출 데뷔를 했어요. 젊은이의 정체성 혼란, 일상 탈출의 욕망 등을 표출했는데 아마 제 얘기 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1995년에 극단 청우를 창단하여 <에쿠우스-이미지네이션>, <종로고양이> 등 제 스타일의 작품을 연출했어요.
정 : 당시 신예로 주목을 받았는데 청우는 어떤 극단입니까?
김 : 동인제 극단으로 창단한 청우는 ‘연극의 원형성, 살아있는 에너지로 돌아가자’는 주제를 내걸었어요. 배우 서로 간의 조화를 통하여 얻어진 에너지로 작품을 만들어 가는 것을 극단의 정체성으로 삼았어요.
정 : 초기작들은 인간의 소외를 주제로 배우들의 앙상블을 구축하는데 역점을 두었는데  <꽃뱀이 나더러 다리를 감아보자 하여>나 <오필리어>는 연극적 과잉이라는 평단의 혹평도 받았더군요. 그러다가 연출가 김광보의 진면목을 보여준 작품이 무엇이었나요?
김 : 공간 활용이 돋보인다는 평을 받은 <종로고양이>였어요. 그 해 문화체육부가 선정한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았어요.

 

극단 청우 망해 송추의 미추산방 찾아가 <뙤약볕> 연출 맡아
정 : 광보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대표작’으로 1998년 극단 미추에서 공연한 <뙤약볕>을 꼽았던데요, 어떤 연유로 미추 작품을 연출하게 되었나요?
김 : 1995년부터 미추 대표이자 연출자인 손진책 선생님의 모든 작품을 보러 다녔어요. 그런데 1997년 극단 청우를 말아 먹어 처자식을 처가로 보내고 경기도 송추의 미추산방을 찾아가 연극하게 해달라며 기숙했어요. 이듬해 손진책 선생님이 제게 연출을 하라고 제안했는데 그 작품이 박상륭의 소설을 각색한 <뙤약볕>이었어요. 좀 어려운 작업이었는데 “관념적인 텍스트를 분석해 연기자들의 육체, 소리, 빛 등으로 표현했다”는 평과 함께 관객 반응이 좋았어요. 그해 서울연극제 공식 초청작으로 선정됐고, 이듬해 백상예술대상 신인 연출상을 받았어요.
정 : 연출가로 도약하는 계기가 된 <뙤약볕>을 2004년 극단 청우 창단 10주년 기념으로 다시 공연했던 기억이 나네요. 고연옥 작가와의 만남은 2001년 <인류 최초의 키스>부터인가요?
김 : 그렇습니다. 청송보호감호소에 수감된 범죄자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을 극화한 제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고 작가는 주제 의식이 강하고 텍스트도 다소 어려운 편이지만 저와는 호흡이 잘 맞는 편이에요.
정 : 김윤철 연극평론가는 <인류 최초의 키스>를  “비워낸 무대 위에 배우들을 통해 긴장과 이완을 병치함으로써 관객과의 소통을 성공시켰다”고 평했더군요. 연극평론가협회도 ‘올해의 연극 베스트 3’ 에 이 작품을 선정했지요.
김 : 2003년에도 고연옥 작가의 <웃어라 무덤아>를 연출해 상을 여럿 받았어요, 포항 바다 국제연극제에서 작품상과 연출상을 받았고, 문예진흥원의 올해의 예술상 우수 작품상도 탔으니까요.
정 : 제가 보기에 고연옥 작가는 실제 벌어진 사건을 극화하여 삶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작가인데 주제가 강렬한 대신 작품의 호흡이 꽤 길고 무거워 연출하기가 쉽지 않을텐데요. 특별한 노하우가 있나요?
김 : 고연옥 작가와는 <인류 최초의 키스>, <웃어라 무덤아>, <주인이 오셨다>, <나는 형제다> 등을 하면서 15년 째 콤비를 이루고 있어요. 남들은 어렵다고들 하지만 텍스트를 세밀하게 분석하다 보면 연극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지점이 나와요.

 

혜화동1번지 2기 동인으로 활동하며 두각 나타내
정 : 김광보 연극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혜화동 1번지 활동 아닌가요?
김 : 혜화동 1번지는 김아라가 이끈 극단 무천의 연습실이었는데 그가 바빠 이성열 연출에게 활용해보라고 해서 연극인 7인이 5백만원씩 투자해 1998년에 출범하면서 붙인 동인 명칭입니다. 1기는 이윤택 기국서 김아라 최성훈 류근혜 등이고 저는 이성열 최용훈 박근형 손정우 등과 2기 동인이에요. 각기 개성이 달라 자기 하고 싶은 연극 했는데 저도 극단 청우의 공연들을 이곳에서 마음껏 하면서 동력을 얻었어요. 당시 제 연극 인생의 멘토인 심재찬 한국연극협회 부이사장이 저희를 집중적으로 도와주었어요.

 

이미경 작 <그게 아닌데> 연출로 2012년 국내 연극상 휩쓸어 
정 : 상복이 정말 많으십니다. 2007년 극단 청우가 무대에 올린 <발자국 안에서>로 서울연극제 대상과 연출상, 일보 삿포로 씨어터 페스티벌 비경연부문 심사위원 특별상, 이듬해 일본 타이니 알리스 페스티벌 특별상을 수상하셨네요.
김 : 자랑 같아 쑥스럽지만 2012년 연출한 이미경 희곡의 <그게 아닌데>로 그해 한국의 연극상을 거의 휩쓸다시피 했어요. 대한민국 연극대상 대상과 연출상, 제49회 동아연극상 작품상과 연출상, 연극평론가협회 선정 ‘올해의 베스트 3’, 월간 ‘한국연극’ 선정 올해의 베스트 7, 히서연극상 등을 받았으니까요.
정 : 남들은 한번 받기도 어려운 동아연극상 작품상과 연출상을 2014년 명동 예술극장에서 공연한 <줄리어스 시저>로 두 번째 받았으니 실력이 대단하시네요.

연출가 김광보는 2009년 10월 부산시립극단 예술감독으로 부임하여 2011년 9월까지 2년 동안 재직하며 <핸리 4세> 등을 공연했고 서울 국립극단과 자신의 극단 청우를 통해서도 꾸준히 연출 활동을 했다. 그리고 2015년 6월 1일 서울시 극단장을 맡아 고연옥 작가의 <나는 형제다>를 연출했고, 올해 <헨리 4세 파트 1 & 파트 2-왕자와 폴스타프>를 발표하여 관객의 호응과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연극은 보고 싶은 욕망과 변화하고 싶은 욕망의 충돌
정 : 자 그럼 이제부터는 김광보의 연출세계와 메소드에 대해 알아볼까요. 김광보의 연극 만들기는 좀 특이하다고 들어왔습니다. 이해랑연극상 심사평을 보면 김광보는 "창작 세계의 밑바닥부터 다져 올라 연출가로 우뚝 선 연극인이며, 우리 현대 연극사를 풍요롭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며 ”그리스 비극으로부터 셰익스피어 극, 근대극, 서사극에 이르기까지 고전들을 두루 섭렵하고 새롭게 해석해 에너지 넘치는 무대를 창출했다. 연륜을 더해가면서 번역극과 창작극을 번갈아 창조하는 동안 '절제의 원칙'에 눈뜨고 '뙤약볕' '헨리 4세' 등 세련된 작품들을 연달아 쏟아내고 있다. 그가 세계 연극사의 고전들을 마구잡이로 해체하는 어설픈 연출가들과는 달리 원작 희곡을 충실히 읽고 현대 감각에 맞도록 조심스럽게 가감하는 차분한 연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고 했어요.
먼저 직설적인 질문부터 할께요. 김광보에게 연극이란 무엇입니까?
김 : 연극은 ‘왜?’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봐요. 연극은 희곡과 싸워 극장을 만나 제3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또한 연극은 보고 싶은 욕망과 변화하고 싶은 욕망의 충돌이기도 하지요. 보고 싶은 욕망은 관객, 변화하고 싶은 욕망은 배우인거죠. 배우가 변화하고 싶은 욕망을 느끼지 않을 때는 관객도 보고 싶은 충동이 느껴지지 않아요. 연극은 변화하고 싶은 욕망과 보고 싶은 충동이 만나는 것이지요.
정 : 그럼 연극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김 : 시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메시지를 어떻게 공연 속에 담아낼까 늘 고심해요. 지금까지는 어느 시대, 어느 공간에서도 인간의 지나친 욕망이 파멸을 가져온다는 메시지를 집요하게 파헤쳐 왔어요. 현대사회의 소통의 부재도 제 관심사지요.
정 : 연극 연출의 영감은 어디서 얻나요?
김 : 제 모든 일상이 연극과 연관되어 있어요. 매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항시 귀를 열어두어 보고 들은 것들을 어떻게 연극에 반영시킬까를 고심해요.
정 :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요?
김 : 그렇습니다. 그래서 텍스트에 파생 되는 인문학 서적이나 소설을 읽거나 영화도 많이 봅니다. 외국 작가로는 푸코, 국내 작가로는 김연수의 소설을 좋아해요. 또한 아침에 일어나면 신문을 읽으며 정보를 얻어요. 주요 신문의 토픽들을 관심사 중심으로 인터넷을 검색해 읽고 있어요. 배우들은 제가 밥 먹는 시간조차 신문 보고 있다고 불평을 해요.

 

2001년 올해의 연극 베스트 3에 선정된 <인류 최초의 키스>

 

배우가 중심이 되는 무대 만들어
정 : 광보씨는 배우 중심의 연출을 한다고 정평이 나있는데 어떻습니까?
김 : 연극은 배우의 예술입니다. 실제 작업에서도 배우의 힘으로 연극을 이끌어 나가려고 해요.
정 : 배우 중심의 연극을 하고 있지만 막상 배우들은 힘들어 다시는 같이 작업하지 않겠다고 할 정도라는데 왜 그럴까요?
김 : 아마도 빈 무대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세트 많이 안세우고 배우 혼자 무대에 서야 하니까 배우가 기댈 언덕이 없어 힘들어 하는 것이라고 봐요. 저는 연극이란 관계의 미학이라고 생각해요. 인물과 인물 상호 관계에서 파생된 캐릭터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니까요. 그것이 드러날 때까지 연습을 반복하다 보면 힘이 들지만 그 과정이 잘 되면 배우의 존재감이 잘 드러나 연극에 긴장감이 생기고 관객도 무대에 몰두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걸 분별하지 못하면 극 중의 캐릭터가 선명하지 못해 배우가 돋보이지 않고 관객도 지루하게 느껴요.
정 : 연극은 흔히 서로를 받쳐주어야 에너지가 생긴다고 하잖아요?  
김 : 예 그렇습니다. 상대방 배우로부터 투영된 내가 중요합니다. 저는 연습할 때 배우들에게 자기 대사의 답은 앞뒤 대사에 있다고 강조해요. 자신의 말, 그 다음 말의 관계를 파악하여 공유하고 체화(體化) 할 때 배우의 연기가 제대로 표출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죠.

 

혹독한 연습, 자학적 연출로 배우들 힘들지만 희열 느껴
정 : 연출 스타일이 하도 예민하고 까칠해 누군가 ‘차돌맹이’ 같다고 했다면서요?
김 : 굉장히 예민한 편이에요. 연습 때 배우의 사소한 호흡까지 잡아내 뭐라고 했는데 요즘은 안 그래요. 지켜보며 기다려주고 협의하면서 배우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요. 포용력이 좀 늘었다고나 할까요.
정 : 연습 과정이 남다르다면서요?
김 : 저는 한 작품을 연출하게 되면 먼저 텍스트 분석 뿐 아니라 배우를 드러내기 위해 서브 텍스트까지 세밀하게 분석합니다. 그 데이터를 가지고 연습에 임하다 보니 테이블 리딩이 길어요. 저는 텍스트와 싸우고 배우와 얘기를 하면서 무대라는 공간과 정면승부를 해요.  스텐딩 리딩 하다가 잘 안되면 다시 테이블 리딩으로 돌아가 배우들이 자각할 때가지 연습을 반복해요. 배우들이 굉장히 어려워 하지만 자기 정서에 기반을 두고 그 대사나 몸짓이 어떤 상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때부터 연습이 쉬워지는 것이죠.
정 : 배우들에게 들은 얘기인데 한 밤중에도 배우들에게 전화를 걸어 작품이야기를 한다면서요?
김 :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그걸 배우들과 토론해 보고 싶어져요.
정 : 연습 중에도 같은 대사나 동작을 수십 번 시키기도 한다는데 왜 그렇게 하는 건가요?
김 : 저는 희곡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으로 작업에 임해요. 대본과 전쟁하듯 철저히 분석한 후 배우들과 리딩이나 연습을 통해 대사 하나, 동선 하나, 작은 몸짓 하나 까지 다잡고 다져 배우의 힘으로 작품의 밀도와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저 자신은 물론 배우들과 사투를 벌일 수밖에 없어요.
정 : 이해랑연극상을 수상한 배우 길해연은 “내가 아는 김광보는… 한마디로 미친 사람, 연극에 미친 사람”이라고 했더군요. “연습이 시작되고 며칠 지나면 손톱을 물어뜯고 벽에다 머리를 짓찧기 시작한다”, 또 “잇몸이 곪고 뒷목이 굳어 고개 돌리기도 힘든 상태가 될 때가지 그는 스스로를 괴롭힌다”는데 꼭 그렇게 해야만 이유가 있나요?
김 :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핵심이 잡히지 않으니까 나를 혹사하고 들볶는 것이지요.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고 에센스만을 추구하다 보니 배우들과도 어쩔 수 없이 부딪치게 되는 것 같아요.
정 : 한 때 몽유병에 시달린 적도 있다면서요?
김 : 2009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연출할 때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잠결에 방 이곳저곳에 헤매다 부딪힌 적이 있어요.
정 : 배우들의 앙상블로 무대를 채우려다 보면 기(氣) 싸움도 대단할 것 같은데 어떻게 기선을 잡나요?
김 누가 제대로 공간을 읽어내느냐가 관건이에요. 공간에 압도당하지 않고 정확하게 읽어낼 때 공간성을 획득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배우들도 스탭들도 수긍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형태는 단순하지만 경험은 엄청난 무대 표출이 목표 
정 : 평론가들이 말하는 절제미, 미니멀리즘을 말하는 거군요.
김 : ‘배우를 어떻게 중심에 놓을 것인가’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고 봐요. 장식이라는 것이 왜 필요한가? 배우가 주체인데, 이 주체를 빼고 어떤 장식이 있어야 하나. 그러면서 불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걷어내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미니멀리즘의 대가 로버트 모르스는 “형태의 단순함이 경험의 단순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고 했어요. 이것이 제 연출의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어요. 형태는 단순하지만 거기 내재된 경험은 엄청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저와 배우들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정 : 평론가 김윤철은 김광보의 연출적 특징을 “희곡에 대한 철저한 해석, 미니멀리즘과 상징의 활용, 인물 간의 관계 중시”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김 : 제 연출세계를 제가 말하기는 뭐 하지만 시작부터 연극이 가지는 절제의 미학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어요. 텍스트의 해체가 아니고 텍스트를 기반으로 현대적인 해석들을 가감하여 장면 하나하나를 풀어나가는 방식입니다.
정 : 조명 스태프로 일한 것이 연출에 도움이 되었나요?
김 :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봐요. 조명실 높은 데서 무대를 보면 판이 보여요. 바둑의 포석처럼 배우의 객관적 모습을 볼 수가 있거든요.
정 : 김광보 연출은 세트나 소도구에 의존하지 않고 가급적 무대를 비우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김 : 그 비워낸 자리에 배우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대사와 움직임을 통해 역할 간의 관계를 분명하게 보여주면 무대에 긴장과 에너지가 생기고 관객들은 인물이 살아있는 무대를 보게 되는 것이지요.

 

매 작품마다 힘들지만 연극하는 동안이 제일 행복해요
정 :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그렇게 힘든 연극을 왜 하는 겁니까?
김 : 매 작품마다 힘들지만 연극하는 동안이 제일 행복해요. 제게 연극은 직업이 아니라 삶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어요. 재밌다 없다가 아니라 연극은 제 숙명 속에 들어와 있고 체화되었다고나 할까요. 연극 하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없어요. 깨어있는 순간, 모든 일상이 연극과 연관되어 있으니까요.
정 : 2015년에만 , <여우인간>, <나는 형제다>, <살짝 넘어갔다 얻어맞았다> 등 7편을 연출했으면 피로도 쌓일텐데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나요?
김 : 저는 천성이 피곤한 인간인가 봐요. 잠들기 전 두 세 시간 매일 영화를 한편씩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자 스트레스 해소법이에요.
정 : 지금까지 연출한 작품이 50여 편에 이른다면서요. 계속 연극만 한 셈인데 다작하는 이유가 있나요?   
김 : 솔직히 말해 연극 말고는 할 게 없어요. 작품을 안 하면 편치가 않아요. 오히려 쉴 때가 지치고 피곤하니까요. 연출을 하면서 삶의 에너지를 받는 것 같아요.
정 : 아까 연극은 변화하고 싶은 욕망과 보고 싶은 충동이 만나는 것이라는데 그렇게 많은 작품을 하면서 지루해 본적은 없나요?
김 : 매번 변화를 추구하다 보니 지루할 틈이 없어요. 작품을 할 때마다 변화하려고 노력하지요.. 똑같은 방식으로 연극을 만들면 그것처럼 지겨운 게 어디 있겠어요.

 

2012년 대한민극연극제에서 연출상을 수상하고 소감을 밝히는 김광보 연출.

 

올해 서울시극단이 공연한 <헨리 4세> 호평 받아
정 : 서울시 극단장을 맡아 연출한 두 작품을 보았어요. 하나는 지난해 공연한 고연옥 작가의 <나는 형제다>이고 또 하나는 올해 공연한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인데 솔직히 말해 <나는 형제다>는 국공립 단체의 성격에 적합한 레퍼토리는 아니었다고 봐요. 지방 공연 중 관객이 도중에 나가버린 일도 있었다면서요?
김 : 네. 그런 일이 있은 후 연극의 공공성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았어요. 시립극단인 만큼 일반 시민 누구나가 볼 수 있는 쉽고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정 : 올 봄에 공연한 <헨리 4세>는 저도 보았지만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이고 연출의 힘도 느껴져 관객 반응도 아주 좋았지요. 연습도 많이 한 것 같은데?
김 : 7주 연습을 꼬박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강행군했어요. 오전 내내 체력 훈련과 칼싸움 연습을 했고 오후에는 배우들 연기가 돋보이면서 앙상블을 이루는 무대 연습에 집중했어요.
정 : 셰익스피어 작품은 관객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데 <헨리 4세>는 대사가 귀에 속속 들어오고 배꼽 잡는 해학이 많아 보기가 편했어요. 연출의 초점을 어디에 맞췄나요?
김 :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욕망, 다시 말해 인간의 욕망이란 무엇인가를 파헤치고 싶었는데 지루하지 않고 재밌다는 관객 반응을 얻어 방향을 잘 잡았다고 생각해요.
정 : 서울시 극단은 어떻게 이끌 계획인가요?
김 : 20년이 다 되어가는 극단이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어요. 서울시극단의 존재감이 약하다고 봐요. 제가 할 일은 서울시 극단의 정체성을 만드는 것입니다. ‘좋은 작품을 더 많은 시민들이 보게 하는 것’을 모토로 서울시 극단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정 : 재임 중 서울 시극단의 모든 작품을 직접 연출하겠다고 했다면서요?
김 : 매 작품 책임지겠다는 의미입니다.

 

내년 초 <사랑의 희극> 연출로 헨릭 입센의 연극세계 재조명
정 : 평론가들은 김광보 연출이 현대 연극을 풍성하게 만드는데 일조했다고 했는데 앞으로 연출하고 싶은 작가나 작품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김 : 현재 한국연극계에는 체흡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지만 저는 기회가 되면 노르웨이 극작가 헨릭 입센(1828~1906)을 연출하고 싶어요. 2014년 LG아트센터에서 <사회의 기둥들>을 공연했고, 내년 상반기에는 최초의 현대극으로 불리는  <사랑의 희극>을 공연할 계획이에요. 제가 추구하는 목표가 사회 구조 속에 감춰진 인간의 욕망을 파헤치고, 위선과 가면을 벗기는 것인데 입센의 작품 속에는 그 같은 사회적 담론을 담고 있어요. <사회의 기둥들>도 그랬지만 <사랑의 희극>도  150년 전과 현재를 대비시켜 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정 : 올해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맞아 구내에서도 <햄릿> 공연 등 재조명 작업이 활발한데 광보씨도 셰익스피어 작품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김 : <햄릿>을 번안한 <함익>이란 작품을 올리려고 해요. 5월말까지 텍스트가 완성되는데
이유 불문하고 쉽고 재미있게 만들려고 해요.

상금 10% 연극인복지재단에 기부
정 : 이해랑연극상 부상으로 상금 5천만원을 받았는데 어떻게 쓸 계획인가요?
김 : 상금 중 10%는 한국연극인복지재단(이사장 박정자)에 기부할 생각이에요. 나머지는 극단 살리는데 써야죠..
정 : 알파고가 인간을 이기는 시대에 연극은 어떻게 될까요?
김 : 두께는 얇지만 끝까지 갈 것이라고 전망해요. 인공지능 시대가 되어도 연극은 살아남아 인간과 호흡하며 힐링을 줄거라고 봐요.

 

긴 인터뷰였지만 사생활은 묻지 않았다.

 

정중헌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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