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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6/07/25 16:59:56  김두호




[인터뷰] 최고참 현역 영사기사 이장원의 극장인생 50년


오래된 옛날 영사기 옆에서 포즈를 취한 이장원씨. 사진=인터뷰365

 

【인터뷰365 김두호】과거에는 영화관을 극장으로 불렀다. 지방의 극장에서는 가수들이 출연하는 쇼 무대가 마련되기도 해서 극장이라는 이름이 친숙했다. 영화관은 예나 지금이나 불이 꺼지면 스크린의 영상만 보이는 캄캄한 암흑의 공간이다. 불이 켜져도 사방에 창구멍 하나 보이지 않고 벽으로 꽉 막혀 시선이 가야할 곳도 없다. 그 영화관 안에 또 하나 칠흑의 방이 뒷벽에 붙어 있다. 스크린에 영상을 쏘아 올리는 영사실이다. 영화관 영사실에서 18살 때부터 74살까지 꼬박 56년을 보낸 사람이 있다.

영사기사 이장원(76) 씨. 
서울 충무로 네거리에 있는 명보아트홀(명보극장) 6층의 명보아트시네마에 근무하는 국내 최고참 현역 영사기사다. 보통 오전 10시부터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그의 일과와 그의 일생은 16mm에서 35mm, 거대한 70mm 영사기를 돌리던 시대를 거쳐 21세기 디지털 시대로 넘어온 지금까지 영화관의 변천사와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해 살아있는 추억의 극장기념관과 같다.

 어둡고 폐쇄된 공간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탓인지 주름진 이마를 받치고 있는 두 눈은 다른 사람들보다 작아 보이고 자그마한 체구는 어디에도 기름진 피부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를 ‘어둠속의 인생’으로 일컫기도 한다. 명보아트시네마 영사실 벽에는 1964년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이 1964년 4월 3일자로 교부해준 영사산업기사 국가기술자격증이 걸려 있었다.


영사기도 아무나 돌리는 게 아니군요.
그럼요. 17살에 안양시내의 최초 극장인 화단극장 영사기사 조수로 일을 시작했지만 자격증은 24살 때 죽을힘을 다해 공부해서 땄어요. 기계, 필름, 렌즈, 발전기, 전기, 앰프 분야의 문제를 풀어야하는데 과목별로 평균 60점 이상을 맞아야 합격시켜주었어요.

 

17살 때부터라면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군요.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서울 원효로 용문시장입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쌀가게를 해서 가족을 부양했지만 내가 원효로 금양초등학교를 다닐 때 6.25가 터져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생이별을 했어요. 아버지는 생사를 모르고 어머니도 실종되어 나는 외할머니 댁에 의지해 살았어요. 나중에 어머니를 찾았지만.

 

어머니를 찾았다니요? 어떻게?
전쟁이 좀 잠잠해지면서 어머니를 찾아 나섰지요. ‘엄마 찾아 3만리’라고 사방에 수소문해가며 돌아다닌 끝에 극적으로 어머니를 만났어요. 강원도와 경기도 경계지점의 최북단 마을에 주둔한 미군부대에서 세탁 일을 해주고 사시더라고요. 혼자서 몸을 지탱하는 것도 고달픈 탓인지 가족을 만날 생각도 못할 만큼 병약하셨어요. 결국 얼마 후 별세해 낯선 땅에 혼자서 장례를 치르고 돌아왔어요. 

 

극장 일을 시작할 무렵의 얘기를 들려주시지요.
내가 부모 없이 가난하게 살아도 공부를 잘했어요. 4학년 때 참 고마운 선생님을 만났어요.  이 나이가 되도록 한 번도 잊어 본적이 없는 구형서 담임선생님이신데 내가 워낙 굶다시피 살아 도시락을 못 싸오면 꼭 몰래 자신의 도시락을 저에게 주셨지요. 나는 그때 거리에서 깨진 유리나 고철을 수집해 팔아 외할머니와 생계를 해결하며 학교를 다녔어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따뜻하게 정을 주신 그 선생님을 생각하면 어려울 때마다 용기와 인내심이 생겼어요. 영화 ‘검사와 여선생’ 보셨어요?

 

예. 아주 어릴 때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나무에 스크린을 걸고 보여주던 가설극장에서  보았습니다. 가난한 소년이 여자 선생님의 도움으로 공부를 해 검사가 되어 억울하게 죄인이 된 여선생의 살인누명을 벗겨주며 은혜를 갚는 감동적인 영화였지요.
그렇지요. 나는 그 영화를 보고 나와 똑같은 처지의 주인공에게 반하고 영화라는 것에 반했어요. 나도 훌륭한 사람이 되어 나를 돌봐준 선생님에게 은혜를 갚겠다는 꿈을 간직하고 살았어요.

 

영화를 좋아해서 더 직업에 애착과 즐거움을 느꼈겠군요. 17살 시절부터 평생 영화를 보고 사셨으니.
처음에는 땅콩이나 과자봉지를 채운 목판을 들고 잠깐씩 쉬는 시간에 장사를 해주는 일을 하다가 영사기사를 돕는 조수 일을 하게 되었어요. 지금은 영화가 필름을 사용하는 시대가 아니지만 거의 평생을 영사실에서 차르르 필름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살아서인지 필름을 돌리는 영사기가 사라지고 다양한 디지털 영상 포맷을 활용하는 지금도 스크린에 영상을 쏘면 여전히 내 귀에는 영사기 소리의 환청이 느껴져요.

 

평생 영화를 보면서 살아와 기억에 남는 영화도 셀 수 없겠군요.
그래도 딱 꼬집어서 작품 이름을 대라면 우리 영화는 1957년에 나온 이덕화의 부친 이예춘과 최은희 선생이 출연한 ‘다정도 병이런가’와 최무룡 조미령 주연의 ‘장마루촌의 이발사’가 제일 잊을 수 없어요. 외국영화는 1950년대 이탈리아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이 만든 ‘쎈소’(Senso)보다 더 감명 깊게 본 영화가 없어요.

 

‘쎈소’는 어떤 영화입니까?
 젊은 장교와 백작부인의 뜨거운 사랑과 배신의 아픔을 줄거리로 한 애정 영화입니다. 백작부인 역을 맡은 알리다 밸리의 아름답고 뜨거운 연기는 평생 생생하게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어요.

 

명보아트시네마 영사실 벽에 걸려있는1964년 4월 3일자 영사산업기사 국가기술자격증. 사진=인터뷰365
지금까지 여러 극장을 옮겨 다니셨을 텐데 옛날 극장들은 개봉관부터 필름 배급과 상영시기에 따라 몇 단계로 구분이 되어 있었지요?
제작이 끝나고 심의를 통과해 첫 상영을 하는 극장이 개봉관이고 개봉관 상영이 끝나면 재개봉관으로 필름이 전달되고 이어서 3봉관, 4봉관, 5봉관까지 있었어요.  나는 안양 화단극장에서 시작해 읍민관 극장, 송탄의 삼보극장, 시흥극장까지 옮겨 다니며 영사기를 돌렸고 한때는 자격증 덕분에 조수를 두고 몇 개 극장의 영사실 운영 책임을 맡기도 했어요.

 

주로 지방극장에서 일을 하셨군요.
아닙니다. 개봉극장에는 있지 않았지만 서울 영등포에 있는 경신극장으로 옮기면서 그 극장을 임대 운영하던 봉석연 사장과 인연이 되어 그 분 극장에서 일한 때가 길었어요.  봉 사장은 국회의원을 한 언론인 출신 봉두완 씨의 부친입니다. 내가 영화사 영업부장과 친분이 있어서 그 사람 덕분에 흥행되는 영화 필름을 다른 변두리 극장보다 빨리 가져올 수 있어서 영사기사로 있었지만 필름 가져오는 일에 매달리기도 했어요.

 

과거 극장들은 필름을 오토바이 배달망을 이용해 극장에서 극장으로 신속하게 전달하는 풍경을 볼 수 있었지요.
서울에 10여개 개봉관이 있던 시절은 개봉관에서 관객동원에 성공한 흥행영화가 나오면 전국의 극장들이 들썩거립니다. 내가 있었던 경신극장은 3봉관 계열인데 2개 프로를 번갈아 보여주는 동시상영을 했어요. 그럼에도 흥행영화는 필름 값이 좀 비쌌어요.

 

극장이 시네플렉스(복합영화관)시대로 접어들면서 남아있는 대형 개봉극장도 시네플렉스로 바뀌고 또 많은 옛날 극장들이 용도를 바꾸거나 다른 건물들이 들어 서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름만 대면 노년층 영화관객들에게 추억이 살아날 극장들이 많습니다. 서울에서 개봉, 재개봉, 3봉 등으로 구분되던 극장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듣고 싶습니다.
70mm ‘벤허’를 상영하면서 국내 최대 극장의 면모를 과시했던 대한극장은 아직도 살아있고 숱한 한국영화들이 흥행영화의 기록을 남긴 명보극장도 공연장으로 남아 있습니다. 국도는 호텔로, 단성사와 피카디리도 개축을 해서 일부에 영화관이 있지만 복합상가 건물로 바뀌었지요. 국제극장과 스카라도 없어졌고 서울극장과 할리우드가 영화관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군요. 재개봉관부터는 남아 있는 극장이 없어요. 대림, 성남, 동대문극장 등이 재개봉관이었어요. 동부, 성수, 천호극장들이 3봉극장이었습니다. 내가 있던 영등포지역만 해도 남도, 영보, 연흥 등 여러 개가 있었어요.

 

경신극장에서 또 어디로 옮기셨어요?
내가 필름 공급을 제대로 해서 극장의 매출이 쑥쑥 올라가게 되자 주인이 임대계약을 해지시키고 자기가 운영을 하게 되었어요. 나는 봉 사장의 소개로 청주로 내려가 대농그룹 방직공장의 사내 극장 영사 일을 맡았지요. 공장 직원이 7천명도 넘어 정기적으로 큰 식당에서 영화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있었거든요. 그러다가 봉 사장이 화양동에 있는 동부극장을 인수해 다시 서울로 왔어요.

 

영사기사는 평생 직급도 변화가 없겠군요.
영사주임으로 불러주기도 하고 또 기술부장이라는 직함을 주기도 했지만 하는 일이 정해져 있으니 직급은 큰 의미가 없어요. 동부극장에서 한 10년 있다가 내가 있던 청주 방직공장으로 내려가 매점을 얻어 직원들을 대상으로 김밥장사를 해서 돈을 좀 많이 벌었어요. 그게 길지는 않았지만 쌀 한가마니를 김밥으로 말아 팔기도 했는데 공장 경영이 어려워져 다시 동부극장으로 돌아갔어요. 그런데 봉 사장이 건강관계로 극장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면서 나는 또 청주로 내려가 잠시 중국요리집을 차려 직업을 바꿔보려 했지만 내 팔자는 아무래도 극장을 떠나면 못사는 건지 쉽게 포기하고 서울로 왔어요.

 

다시 영사기를 잡은 거군요.
종로 할리우드극장에서 한 3년 있다가 안산 중앙동에 있는 명화극장으로 옮겨 좀 있었지요. 집이 의정부에 있는데 지하철 타고 두세 시간 거리의 안산을 다니기가 힘들어 그만두었어요. 서울 충무로 명보극장에서 일을 시작한 것은 2013년부터인데 주로 노인층 관객들을 위해 흘러간 명화를 보여주기 때문에 관객들과 옛날 기분을 나누며 사는 게 즐거워요.

 

지금도 여전히 영화를 틀고 있는 영사기사 이장원씨. 사진=인터뷰365

 

과거 지방극장에서는 이동 극단이나 가요 쇼 무대가 마련되어 극장이 흥겨운 공연장으로 사랑을 받기도 했지요?
서라벌악극단, 낭랑악극단 등 유명한 악극단이 순회공연을 할 때도 있었고 쇼단에 소속된 인기 가수들과 코미디언들이 춤과 노래, 코미디로 청중을 불러 모으던 시절이 있었지요.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번창했어요.

 

시대에 따라 관객들의 영화감상 성향이나 극장 분위기도 바뀌었지요?
물론이지요. 지금 관객들은 영화를 게임 보듯이 가볍게 즐기지만 과거에는 주로 멜로드라마를 좋아해 슬픈 영화가 나오면 영화가 끝나면서 훌쩍훌쩍 우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또 극장 관람료가 없어서 몰래 들어오다가 쫓겨나는 젊은이들이 많았고 상영 중 필름이 끊어지는 소동도 빈번하게 일어나 야유와 휘파람 소리로 소란이 일어나기도 했어요.

 

기억에 남는 사건이나 추억도 많겠지요.
한 때 16㎜영사기를 들고 다니면서 극장이 없는 수원 변두리나 면소재지 같은 동네를 찾아가 가설극장을 열기도 했어요. 한 2년간 떠돌이 영사기사 노릇도 했는데 아주 낭만적이었지요. 관객들이 너무 진지하게 영화를 보기 때문에 어지간한 영화는 모두 감동을 받아 황홀해 해요. 어딜 가나 그 시절은 때 묻지 않고 순수한 시선과 인심들이 좋았어요.

 

평생 영사기와 산 인생에 후회는 없어요?
천직이려니 살아 다른 욕심이 없어서 후회 같은 생각을 하지도 않았어요. 마지막 상영을 하고 밤 10시 넘어 집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누워도 필름 돌아가는 소리는 멈추지 않고 들려요. 눈을 감아도 스크린의 영상이 눈 안에 가득하고.

 

가족은요?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아들(이영욱 44) 은 중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어요. 시집간 딸(이경희 40)도 중국에서 아동복 판매사업으로 크게 성공해 매월 용돈을 보내줍니다. 가끔 중국에 가면 자식들 키운 보람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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