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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6/09/19 12:31:20  김두호




[인터뷰] 평생 찾아 헤맨 ‘만추’ 필름, 회한으로 남은 영화평론가 호현찬


우너로 영화평론가 호현찬 선생. 사진=인터뷰365

 

【인터뷰365 김두호】해방 이후 한국영화의 현대사가 열리면서 1세대 영화 저널리스트 겸 영화평론가, 1960년대의 대표적인 걸작선에 들어가는 ‘만추’(이만희 감독)의 기획 및 제작자이기도 한 호현찬 원로 영화평론가를 만났다.

 

1926년 9월20일 대전에서 출생했으니 아흔을 넘어선 은발의 노안이었지만 홍조를 띤 얼굴이 곱게 보였다.

 

영화진흥공사 사장(현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을 끝으로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16년째 일산 마두동으로 이사해 살고 있는 그는 10여 년간 투병생활을 하는 부인의 간병을 하다가 이제는 자신도 바깥  출입을 못해 신체적으로 불편을 겪고 있지만 정신은 맑고 대화는 명료하게 이어갔다.

 

근황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미안해요. 이곳까지 찾아오시다니. 이제 잘 걷지도 못해 기력도 예전 같지 않고 기억도 감퇴해 떠날 날도 다된 것 같아요. 서울을 떠난 후 외출도 하지 않고 사람들도 만나지 않아 고도에 살듯이 살고 있어요.

 

젊은 생애를 모두 영화 쪽에 바치셨지요.
그래요. 영화를 떠나서 내 인생은 아무것도 얘기할 게 없어요. 그런데 지난 삶을 돌이켜 보면 성장기부터 참 파란만장했습니다.

 

성장기에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요?
내가 사실은 고등학교도 제대로 못 다닌 상처를 가지고 살았어요. 뒤에 졸업장을 받고 홍익대 영문과를 다녔지만 5년제 대전공립중학교(현재의 대전고교) 재학 때인 일제 강점기에 반일운동 사건에 연루되어 퇴학처분을 받고 3년 징역형을 받았었지요. 나중에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꿈 많은 나이에 상처를 받아 그 때는 갈 길이 막혔지요.
(그는 묵은 자료더미에서 찾아낸 빛바랜 서류를 보여주며 말을 이어갔다. 대전중 교장의 직인이 찍힌 공문서 기록을 보면 단기 4273년(1944년)에 겪은 사건 기록이다.)
 해방 후인 1955년에 대전 중 24회 동기생들과 교사들의 연대 서명을 통한 진정으로 학교장이 졸업증을 발급해준 기록입니다. 어쩌다 이 얘기를 처음 털어놓게 되었군요.

 

반일사건에 가담한 사건의 내용을 알고 싶군요.
마지막 일본의 강압통치가 극에 달해 있을 때 일본식 교육에 저항하는 반일 학생조직에 깊숙이 참여했다가 정보원들의 제보로 붙잡혀 처벌을 받은 거였지요.

 

영화 쪽에는 언제 어떤 동기로 관심을 두게 되었어요?
내가 중도일보사 기자로 시작해 서울신문사와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로 옮겨서 활동하며 영화계 출입을 하게 되면서였지요.

 

그 시절 잊을 수 없는 일화도 많겠군요.
신문사도 많지 않았고 영화 기사를 쓰는 기자도 몇 명 안 될 때였으니 기자들의 책임도 그만큼 무거웠어요. 


잊을 수 없는 비화가 있다면 어떤 일부터 떠오릅니까?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시절입니다. 4.19 혁명이 천지를 진동하던 때였지요. 영화 ‘마부’ ‘박서방’ 등 명작을 많이 남긴 당시 최고의 인기배우인 김승호 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전화를 해왔어요. 성난 군중들이 서울 청진동에 있던 자기 집을 불태우고 자신을 그냥 두지 않겠다며 뒤좇고 있는데 어떡하면 좋으냐고 물어왔어요.

 

김승호라면 우리 영화 연기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대단한 명배우였고 거목입니다. 사랑받는 영화배우가 왜 그런 수모를 당했어요?
자유당 정권 말기에 희극배우 김희갑 씨가 영화제작자로 활동하면서 반공청년단을 이끌던 주먹 보스 임화수의 폭력으로 갈비뼈가 부러지는 사건도 우리 기자들이 파고들어 문제를 삼았는데 김희갑은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 선정행사에 불참하겠다고 해서 보복을 당한 거였지요. 그런데 김승호 씨는 그 무렵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자유당 선전집회의 강제 차출을 거절 못하고 관중 앞에서 연설한 것이 화근이 되었어요. 
전화를 하고 곧장 달려온 김승호 씨를 으슥한 다방 구석자리에서 만났어요. 그는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으면서 해결책을 물었어요. 나는 그날 논평 없이 짤막하게 김승호 씨가 연기활동을 그만두고 은퇴한다는 기사를 실었어요. 

 

실제 은퇴를 한 건 아니었지요?
활동을 재개한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서였어요. 소용돌이치는 시대변화와 정변 속에 그의 지난 과오도 묻혀버렸고 사람들도 불가피하게 이용당한 걸 이해하게 되어 다시 연기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서울신문사 사우회에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영화자료를 기증한 호현찬 선생.

 

1962년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부터 영화 기획자 겸 제작자로 활동하면서 한국영화 충무로시대 전성기의 디딤돌을 놓기도 하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영화를 제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성공도 하고 실패도 했습니다. ‘아낌없이 주련다’가 그 시대 젊은이들의 애정문제를 밀도 있게 다룬 화제작으로 크게 주목을 받아 흥행에도 성공했습니다. 한운사 시나리오를 신성일 이민자 엄앵란 허장강 등 그 당시 인기 있는 배우들이 등장해 애정 멜로물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신성일이라는 신인이 그 작품으로 크게 떠올랐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김수용 감독과 ‘갯마을’ ‘날개부인’을 제작하고 1966년 이만희 감독과 신성일 문정숙이 공연한 ‘만추’를 만들었어요.

 

‘갯마을’은 때 묻지 않은 자연 속에서 고달프고 외롭게 살아가는 여자들의 삶을 서정적인 영상미로 그려낸 수작으로 평가받아 대종상 청룡상 백상예술상 부일영화상 아시아영화제 등에서 많은 상을 받았지요. 우리 현대영화사에서 평론가들이 선정하는 걸작선에 또 1966년 작품 ‘만추’가 언제나 몇 손가락 안에 꼽힙니다. 제작 당시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1965년 여름이었지요. ‘날개부인’과 ‘갯마을’을 성공적으로 개봉하고 새 작품을 구상하던 시기에 이만희 감독이 날 찾아왔어요. 그와 만나면서 ‘만추’의 제작을 결심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낙엽이 지는 창경궁 벤치에 홀로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인의 초조하고 쓸쓸한 표정,, 그로부터 1년 전 모범수로 휴가를 얻어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가는 열차 안에서 위폐범으로 쫓기는 청년과 우연히 마주 앉았다가 열차가 고장으로 멈춘 틈에 산속에서 참았던 본능을 그 청년과 나누는 정사 장면이 아직도 충격적인 영상으로 기억됩니다. 문정숙 신성일의 대표작이기도합니다.
1966년 명보극장에서 연말프로로 개봉되어 대박의 흥행 인파를 모았지요. 그때 서울시 인구가 몇 백만 안 될 때 한 극장에서 20만명이 관람을 했어요. 해외 수출도 효시로 볼 수 있습니다. 스페인 미국 일본 홍콩 독일까지 수출되고 그동안 리메이크 한 작품도 김기영, 김수용, 김태용 연출작품까지 세편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필름이 남아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게 내 평생의 회한입니다. 영화진흥공사 이사 시절 한국영화 필름 보관의 중요성을 앞장서 주장하고 뒤에 영화필름보관소가 사업을 확장해 한국영상자료원으로 분리 독립할 때 이사장으로 참여한 것도 나에게는 의미가 많았습니다.

 

해외 수출을 했다면 프린트라도 남아 있을텐데요.
네거필름을 미국에 보냈다가 회수되어 관세청에서 관세를 내고 찾아가라고 통지가 왔지만 그 무렵 필름 회수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어요. 후속 작품에 매달려 있었고, 1968년에 만든 이만희 감독의 ‘창공에 산다’라는 작품에 모든 것을 쏟았다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참 힘든 시기를 맞이했어요. 뒤에 필름을 폐기 소각했다는 통보를 받았고 많은 세월이 흐른 뒤 일본과 스페인 독일 등지에 수소문했으나 그 프린트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야말로 ‘만추’는 1960년대 그 영화를 본 사람들 외에는 그저 한국영화의 수작이라는 평가를 듣기만 하고 화면을 접할 수 없어서 전설이 된 작품 같습니다.
그런데 희망은 있어요. 타계한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씨가 북한을 탈출해 서울에 왔을 때 그 영화를 북한에서 봤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어떤 경로로 북한에 건너갔는 지 알 수 없으나 영화수집광이었던 김정일의 영화창고에는 ‘만추’ 필름이 있는 것 같아요.

 

호현찬 영화평론가는 이만희 감독의 대표작 '만추' 필름을 보관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기고 있다.

 

영화진흥공사 사장, 공연윤리위원회(현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장, 그리고 영상자료원 이사장도 하셨고 영화평론가협회 회장도 역임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저서 가운데 ‘한국영화 100년’은 국내판과 일본어판이 출간되어 우리 영화사를 집대성한 귀중한 명저로 남아 있습니다. 2019년이 한국영화 100주년인데 감회가 남다르시겠습니다.
내 인생에서 기념이 되는 일이라면 그 책을 펴낸 일입니다. 지금은 구하기 힘들어 내가 재직했던 서울신문 사우회에 최근 한국어판과 일어판 두 권을 기증했어요.

 

일산으로 떠난 뒤 주로 자택을 떠나지 않고 살아온 호현찬 원로 평론가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영화계 지인들의 근황을 궁금해 했다. 이미 타계한 영화배우 최무룡 씨의 근황을 묻기도 했고 함께 기자생활을 한 신우식 전 서울신문 사장의 활동도 궁금해 했다.


“공직생활도 많이 했지만 털끝만큼도 사욕을 앞세운 적이 없어요. 이렇게 출입을 못하고 사람들을 떠나 살아 내가 생존한 줄 모르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몇 번이고 “미안합니다. 반갑습니다”를 반복하며 작별 인사를 하는 호현찬 원로 영화평론가의 애잔한 눈길과 정겨운 목소리가 돌아서는 기자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어렵게 노후를 보내고 있는 노부부의 아래층에 다행히 효자 효부로 알려진 호소웅 정진악 부부가 살고 있었다. 화가인 정진악 여사는 작가이기도 한 정한모 전 문공부장관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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