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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6/11/28 14:39:13  김두호




[인터뷰] 한국영화 대표 미녀배우 김지미, 보통 여자로 행복하게 사는 이유
“지금은 내 인생 내 맘대로 살지만 배우 인생에 은퇴란 없다”


미국에서 오랜만에 귀국해 인터뷰에 응한 배우 김지미. 사진=인터뷰365

 

【인터뷰365 김두호】2017년이면 만 77세, 이제는 원로 배우 대접을 받는 나이지만 여전히 ‘김지미’란 이름은 영화인들의 머릿속에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가장 예쁜 여배우의 심볼로 살아있다. 그녀가 최근  대중문화에 기여도가 많은 예술인에게 정부가 수여하는 은관문화훈장을 받고 또 신입 회원이 된 대한민국예술원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머물다가 다시 거주하던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갔다.

배우와 기자관계로 가까이서 긴 세월을 함께 해온 필자가 오랜만에 미국에서 돌아온 그녀를 인터뷰했다. 공사(公私) 자리에서 빈번하게 만나다가 출국 전날 밤 그의 서울 자택이 있는 이촌동의 단골 음식점에서 저녁을 함께 하며 정색을 하고 인터뷰를 시작하자 ‘할머니와 엄마 자리로 돌아온 지금이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한없이 편안한 여유와 자유를 누리며 내 인생을 내 맘대로 살고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

1957년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황혼열차’로 은막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가 열일곱 소녀 시절이다. 160cm의 키에 50kg을 넘어선 적이 없는 가녀린 작은 몸 갈피마다 대중문화의 모태가 된 한국영화 중흥기의 명암과 화려한 기록들이 켜켜이 꽂혀있다. 한 여자로서의 생애도 특별했다. 홍성기 감독과 배우 최무룡, 가수 나훈아에 이어 내과의사와도 결혼했지만 모두가 옛 이야기들이다. 그는 오래전부터 유유자적(悠悠自適) 독신생활을 즐기고 있다.
영화와 사랑과 인기를 풍미하며 한 시대를 대표해온 절세가인은 보통의 할머니로 돌아가 홀가분하게 미국과 서울을 오가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에게 지금 무엇이 그렇게 행복한지를 물었다.


자주 뵙는 분에게 새삼 인터뷰를 요청하니 갑자기 어색해진다. 이번에 은관문화훈장을 받은 소감부터 얘기해 달라.
하하하. 보관문화훈장도 받고 서울시문화상도 받은 적이 있다. 또 영화제에서도 많은 상을 받았지만 이번에 받은 훈장수여식은 무슨 쇼 공연같이 프로그램을 진행해 깜짝 놀랐다. 대중문화예술상이라는 별도의 명칭이 따르긴 했지만, 받는 사람의 느낌은 훈장이라기보다 여러 사람이 기념 매달을 받고 공연 관람을 하는 기분이 들어 별로 보람을 느끼지 못했다. 훈장이라는 이름이 고맙지만 이제 이런 상을 받을 나이도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기인으로 시선을 받아가며 화려하게 보낸 세월을 하루아침에 잊을 수는 없을 텐데 나이가 들면서 허전하거나 소외감을 느낄 때는 없는가? 더구나 미국에 살면 더 외로울 텐데.
무슨 말씀을. 아주 행복하다. 서울을 떠나면서 나는 비로소 조용하고 단란한 한 가정의 한 여자, 자식을 둔 어머니, 손자 손녀를 키우는 보통 할머니의 자리로 돌아갔다. 철부지 소녀로 연기를 시작하면서부터 내 몸, 내 인생은 세상에 내놓은 거나 마찬가지가 됐다. 내 인생을  내 맘대로 하는데 눈치를 봐야 했고 제한이 따랐다. 영화라는 보이지 않은 울타리 안에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살았다. 물론 내가 선택을 하고 결정을 하는 일들이었지만 내 자신만을 앞세워 마음 놓고 놀지도 못하고 아내 구실, 엄마 구실 할 수 있는 시간적 정신적 여유도 편치 않았다. 영화배우를 천직으로 살았지만 그게 나의 발목을 잡고 나를 놓아주지 않아 내 인생도 따로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그럼에도 누구보다 많은 남자와 사랑을 나누며 부러울 정도의 결혼생활도 했지 않은가?
결국 성공하지 못한 결혼생활도 한 여자로서의 여유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허겁지겁 인생을 즐기지 못하고 살았다는 자책감을 느낄 때가 있다. 다만 나는 비굴하거나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는 인생을 살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왔다. 부끄러울 일은 없다. 언젠가 사회 명사 한분이 나의 지난 사생활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어서 톡 까놓고 따지며 물었다. 김지미에게 흠이 있다면 여러 번 결혼한 것뿐이다. 모두 실패했으니 그걸 나쁘게 보시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럼에도 평생을 두고 누굴 힘들게 하거나 욕먹을 짓을 한 적 없이 떳떳하게 살아왔는데 팔자가 다른 것을 나쁘다고 말씀하시면 서운하다고 말했다. 8남매 형제 많은 집안의 일곱 번째로 태어나 조카들 학업 뒷바라지까지 하며 열심히 살았다.

 

그 양반의 말문이 막혔을 것 같다.
내가 그냥 보통 여자라면 결혼을 몇 번 해도 관심거리가 되지도 않고 누가 화제로 올리겠는가. 기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쫓아다니는 결혼을 네 번씩 하다가 보니 만나고 또 살고 헤어질 때마다 시끄러웠다. 팔자가 그렇게 센 여자이니 어쩌겠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부부생활을 한다는 고통도 내 인생의 불행이었다.

 

그는 지금 미국에서 남의 눈 의식하지 않고 엄마로 할머니로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진=인터뷰365

 

미국 생활을 시작한 때가 언제인가?
영화인협회 이사장과 내가 만든 영화복지재단 이사장 자리를 내놓고 2000년대 초 딸이 사는 미국으로 떠났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버리고 떠나면서 비로소 내 인생의 해방기를 맞이했다. 가끔 서울에 다녀 가곤 하지만 딸(배우 최무룡과의 사이에 낳은 밍크) 가족과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서 좀 떨어진 동네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다.

 

그렇게 평화로운 일상이 궁금하다.
큰 손자가 치과이사를 지망해 곧 대학생이 된다. 그동안 손자 둘에 손녀 하나가 자라는 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고 뒷바라지하는 할머니 노릇이 나를 즐겁게 하고 아무 이해관계 없이 만나는 그곳 친구들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남들 눈치코치 안보고 아무거나 걸치고 민낯으로 돌아다녀도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어 나의 세상이 자유롭고 무한하게 느껴진다. 유명하다는 것은 귀하고 부러움을 사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생활에는 불편하고 제약이 많다.

 

여전히 외모 관리도 잘하고 건강하게 보인다. 비결이 있는가?
한 시간쯤 떨어진 곳에 자두 매실 등 과일나무를 심어놓은 세컨드하우스(주말 별장)가 있다. 가끔 나무를 손질하고 밭일도 한다. 집안에서도 부엌일에서 꽃을 가꾸는 일, 청소 등 쉬지 않고 움직이며 산다.(그녀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주로 거주하는 저택을 방문한 지인은 화장실이 겸비된 침실만 9개라고 귀띔한다)

 

평생을 두고 정을 나눈 사람들이 그래도 서울에 살고 있으니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생존한 사람들 중에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어떤 분들이 먼저 떠오르는가?
1957년 ‘황혼열차’부터 내가 영화사 지미필름을 설립해 제작했던 1992년 작품 ‘명자아끼꼬쏘냐’에 출연하기까지 촬영장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 영화인들은 다 잊을 수 없는 분들이다. 영화계 밖의 분들이라면 언론인 출신으로 소비자단체를 이끌며 사회활동을 하시다가 별세한 정광모 선생부터 생각난다. 내게 10살 연상이라 언니 같은 분인데 내가 어려울 때마다 맨토가 되어 인생의 지혜와 지침, 철학을 전해주셨다. 이화여고를 나온 우리 둘째언니의 선배가 되기도 해서 친동생처럼 아껴주셨다. 나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마음으로 의지하며 살던 분이었다.
그 다음은 50여년 배우생활을 하는 동안 내 의상을 전담해주신 디자이너 박윤정 선생이다. 나는 평생 그 분 옷만 입고 활동했다. 영화배우에게, 특히 여배우에게 의상은 외모와 외형을 살리는 원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앙드레 김 디자이너도 가깝게 지냈지만, 박윤정 선생이 워낙 선배 분이라 감히 자신에게 의상을 맡겨 달라는 말을 못했다.

 

인생과 직업세계에서 정말 소중하게 인연을 나눈 분들로 보인다.
그렇다. 김지미를 영화배우로 당당하게 살게 하고 꾸준히 사랑받게 하면서 성공시킨 배후의 두 주역 후원자였다.

 

회고록 얘기에 그는 "그런 시끄러운 짓을 왜 하냐?"며 일축한다. 사진=인터뷰365

 

당신을 알고 있는 영화인들은 통이 큰 여자, 배포를 당할 사람이 없는 여장부로 일컫는다.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판단되면 절대로 굽히지 않고 바른 소리를 하며 관철하는 기질에서 누굴 돕는 일, 예를 들어 제작비가 없는 영화인에게 선뜻 노개런티로 출연을 해준다거나 어떤 의미 있는 일에 배팅을 할 때면 깜짝 놀랄 만한 결단력을 보여 그런 소리가 나온 것 같다. 스스로도 그걸 인정하는가?
하하하(그녀는 이 질문에서 박장대소 했다).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다고 굽히고 살아야 되는가? 잘못한 일이면 바로 인정을 하고 입을 다물지만 부당한 건 입 다물고 못 참는다. 소리쳐야 할 때는 소리치며 살아야지.

 

이제 회고록을 한 권 준비할 때도 됐다. 당신의 화려한 전성기가 한국영화의 황금기였다. 하고 싶고 남기고 싶은 얘기도 많을 것이다.
내가 회고록을 쓰면 본 것 안 본 것 다 까발릴 텐데 생존한 사람도 많아 그런 시끄러운 짓을 왜 하나. 살아온 얘기에 내 잘난 얘기만 늘어놓으면 누가 보겠는가? 그래서 쓸 생각이 없다. 지금도 서울 오면 TV 출연 요청이 끈질기게 온다. 주변 친구 지인들을 동원해 간청도 한다. 김지미는 스크린 배우이지 TV에 등장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금기사항으로 지켜왔다. 절대로 안 나간다. 비록 활동을 안 하지만 나는 영화배우로 살고 있고 은퇴란 말을 한 적이 없다. 그 말은 죽을 때까지 안하고 그냥 사라질 것이다.

 

앞으로 어떤 계획이라도 있는가?
이대로 조용히 나를 위해 사는 것이 과제일 뿐이다. 당신이 과거 내가 살던 정릉 집에 와서 보았을 것이다. 그 집에는 온갖 영화사진과 상패들이 기념관처럼 장식되어 있었다. 지금 미국 집에는 아무것도 없다. 내가 유명한 배우였다는 흔적을 집안에서 지웠다. 자식이나 손자 손녀들이 혹시 그런 기념물을 보며 필요 외의 심리적 위축감을 느끼며 사는 것을 우려해서다. 난 이대로 더 이상 소문 없이 조용하게 살도록 버려두기를 부탁한다.

 

최근 영상자료원에서 상영한 영화 '을화'의 변장호 감독(왼쪽)과 제작자 이우석 동아수출공사 회장(오른쪽)/인터뷰한 영화평론가 김두호와 함께. 사진=인터뷰365

 

김지미와 인터뷰를 하면 돌아오는 대답이 모호하지 않고 분명하며 단호하다. 가끔 함께 음식점을 찾으면 주인이 사진을 찍으려 하고 사인을 요청한다. 그럴 때 김지미는 “나는 한국영화가 비싼 돈을 내고 키운 배우로 살았다. 저기 벽에 갖다 붙여놓고 음식점 선전하는 인물이 되면 영화인들이 서운해 한다”며 단칼에 거절한다.


여전히 시선이 모이는 장소에서 보여주는 김지미의 처신은 당당한 영화배우로서의 자존심을 낮추거나 기가 꺾일 기미가 없다. 도도하다. 이제 성형미인의 시대로 세상이 바뀌었지만 얼굴에 칼을 대는 것을 거부하고 머리도 염색 없이 은발 그대로 살아간다.


김지미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것이 또 있다. 누가 뭐라 해도 진정한 애연가다. 꾸준히 담배를 벗해 살고 있다. 그는 부모 대부터 가족들이 담배를 좋아해 DNA와 관련이 있다는 얘기도 했다. 가끔 생각이 깊어질 때 한 모금 후하고 불어내는 담배 맛을 버리지 못해 금연 노력도 실효성이 없었다고 고백한다. 드러나지 않은 한 여자의 가슴 깊은 곳에 떨쳐버릴 수 없는 한과 고독을 아마도 그 한 개비 담배연기가 달래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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