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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7/05/16 18:36:46  유이청




이준익 감독이 20년 동안 ‘박열’을 품은 이유


영화 '박열' 포스터.

 

【인터뷰365 유이청】이준익 감독이 12번째 작품으로 ‘박열’을 택한 이유를 밝혔다.


이준익 감독은 20년 전 영화 ‘아나키스트’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자료 조사를 하면서 박열에 주목하게 됐다. 일제강점기에 활약했던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 유독 박열에 눈이 간 것은 그의 불덩이 같은 삶 때문이었다.


이 감독은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했지만 이 분은 아주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혹한 역사를 묻으려는 일본 내각을 추궁하고 적극적으로 항거하는 박열에 대해 우리가 모르고 산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영하로나마 박열의 삶을 꼭 보여주고 싶었고 20년을 공들인 끝에 영화가 탄생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경북 문경 출신인 박열(1902-1974)은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가 무정부주의 운동에 투신했으며 비밀결사 흑도회, 흑우회, 불령사를 조직해 활동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일본은 무고한 조선인 6천명을 학살했고 박열과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를 비롯한 불령사 회원들을 폭동을 계획했다는 혐의로 구속했다.


검찰에 기소된 박열은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는 것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리고 공판에 앞서 재판장에게 죄인 취급을 하지 말 것, 동등한 좌석을 설치할 것, 조선 관복을 줄 것, 조선어 사용 등 네 가지 조건을 요구했다.


일본 사법부가 그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임에 따라 박열은 조선 관복을 입고 출두해 반말투로 답하는 법정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미리 써뒀던 음모론, 나의 선언 등을 통해 일왕의 죄를 폭로했다.

 

이준익 감독.


박열은 1926년 후미코와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주일 만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일본 사법부 스스로 조작된 사건임을 밝힌 것이다.


두 사람이 일본 검찰의 신문을 받던 당시 다정한 포즈를 취한 사진을 일본인 검사가 직접 찍어 누출하는 바람에 일본 정계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두 사람은 사형선고 1개월 전에 혼인신고를 해 부부가 됐다. 하지만 각각 다른 형무소에 수감됐고 후미코는 1926년 옥중에서 자살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22년2개월 만에 석방된 박열은 1949년 영구 귀국했다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납치됐다. 사후인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이준익 감독은 “영화를 보면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이 어떻게 일본 법정에서 저런 일을 벌일 수 있지?라고 놀랄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속 모든 이야기는 박열의 활약이 담긴 신문과 기록물들을 통해 고증한 명백한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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